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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11월 5일] 채무자 괴롭히기

사람의 가슴살 1파운드를 떼어낸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1파운드가 453g이므로 라면 4개에 조금 부족한 정도의 분량이다. 이 정도 분량이라면 채무자는 죽거나 죽을 위험에 직면할 것은 뻔하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보듯이 중세 영국에서는 채무자의 가슴살 1파운드를 베어내도 된다는 계약이 계약자유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이뤄졌던 것 같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채무자는 이처럼 죽일 놈으로 취급됐다. 고대 희랍에서는 채무자 및 그 가족과 노예의 자녀를 노예로 했으며, 베버는 이들 노예를 ‘말하는 도구’라고 해 반쯤 말을 하는 가축과 구별했다고 한다. 로마의 12표법은 채권자가 채무자를 티베르 강 너머로 매각할 수 있도록 했다. 자국 영토 내에서 매각할 수 없도록 한 것은 얼굴을 뻔히 아는 사람을 노예로 부려먹는 게 낯부끄러웠기 때문이었을까. 로마의 12표법 중 제3표법에서는 채권자가 채무자를 살해해 그 시체를 나누거나 노예로 팔아서 채권의 비율에 따라 분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조 시대에는 가장이 노름빚을 아내로 갚는다거나 자식을 빚 대신 노비로 팔아먹은 일이 많았다고 지난 1898년에 작성된 프랑스 외무부문서는 밝히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야만적 현상이 인간 세계에서 횡행해왔던 셈이다. 멀리 살펴볼 필요도 없이 오늘날의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야만적 채무자 괴롭히기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 특히 악덕 사채업자가 고율의 이자를 받으면서 채무자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 문제이다. 이와 같은 악덕 고리사채업자가 발붙일 기회를 절대로 줘서는 안 되며 그로 인한 소득은 끝까지 추적해 환수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채무자라고 해서 모두가 사회적으로도 나쁜 사람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미국 독립선언의 기초자인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도 평생 빚에 시달렸고 남북전쟁 때 연방군 사령관으로서 후에 대통령을 한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 장군도 빚을 갚지 못한 채 죽었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에도 의사ㆍ변호사ㆍ연예인 등 사회의 중견인들이 채무자로서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며 협박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한 사건으로 사회가 떠들썩하다. 일시적으로 빚에 쪼들리지만 기회를 주면 회생해 사회에 기여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사람들이다. 아테네의 집정관이 된 솔론은 모든 빚을 말소하고 채무자의 신체를 담보로 해 노예로 삼는 제도를 폐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그 후 아테네의 상공업이 크게 부흥했다. 유대인은 50년마다 토지를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고 부채를 탕감하는 희년제라는 제도를 두고 있었다. 구약성경 신명기 제15장에서 7년마다 이웃에 대한 채무를 면제하고 동족 노예를 사서 6년을 부렸으면 7년째에는 해방하고 빈손으로 보내지 말라고 해 채무자가 회생할 수 있는 종자돈까지 쥐어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채무자는 아랫도리를 벗고 넓은 광장에 뛰어나가 엉덩이를 기둥에 비비면서 “나는 망했다”고 세 번 크게 외치면 채무를 면제해주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채무자 구제를 위한 각종 제도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조건적인 면책이 아니라 채무자로서 겪어야 할 응분의 대가가 있다는 점이다.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6년을 노예로 사는 동안 온갖 고초를 겪거나 중세 이탈리아처럼 아랫도리를 벌거벗은 망신을 당한 다음에야 면책을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도덕적 해이를 경계하는 교훈을 찾아볼 수 있다. 정부가 각종의 채무자 구제책을 시행함에 있어 협박ㆍ살해ㆍ납치 등 불공정한 채권추심을 철저히 방지함과 아울러 실효적인 채무자 회생제도를 시행해 채무자가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되 빚진 게 자랑은 아니라는 인식도 심어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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