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전자매장을 찾은 이건희 삼성 회장은 큰 충격에 빠졌다. 소니ㆍ파나소닉 등 일본 제품들이 당당히 매장 한가운데를 꿰차고 있던 것과 달리 삼성전자 제품은 한쪽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고객들에게 외면당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에 자극 받은 이 회장은 4개월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그룹 임원들을 소집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라는 말로 유명한 이른바 '신경영'을 선언했다. 이후 이 회장은 "우리의 경쟁자는 소니"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본격적으로 일본 따라잡기에 나섰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삼성전자와 소니의 명암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올 1ㆍ4분기 삼성전자의 매출액(52조8,700억원)은 소니(1조7,330억엔)를 3배 가까이 넘어섰고 영업이익은 무려 5배를 뛰어넘는다.
불과 20년 만에 두 기업의 운명을 뒤바꿔놓은 것은 무엇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안정적인 경영권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리더십을 꼽는다. 소니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한 뒤 사업부 간 경쟁과 갈등으로 의사결정이 늦어지며 신규사업 진출 기회를 놓쳤다. 반면 삼성전자는 당장 돈이 되지 않더라도 먼 미래를 내다본 오너의 선제적인 투자결정 덕분에 오늘날 글로벌 브랜드로 우뚝 설 수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세계가 주목하는 오너 경영의 힘=경쟁사보다 한 박자 빠른 의사결정과 강력한 추진력을 무기로 한 오너 경영의 성공 스토리는 이제 해외에서도 새로운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다. 캐나다의 지속가능경영네트워크는 지난해 2월 "삼성전자와 BMWㆍ월마트 등 오너 기업에 투자한 주주들의 만족도가 높아지고 있고 과거 부정적 평가를 받던 오너 경영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가 2000~2011년 아시아 10개국 오너 기업 3,568개사의 주가 수익률을 분석한 결과 시장의 평균 수익률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불황 속에서도 오너 기업들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과감한 결단력과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안정적인 경영권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마찬가지로 한때 세계 전자업계를 주름잡던 노키아와 소니가 몰락하게 된 원인 역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업을 이끌어갈 안정적인 경영권의 부재에서 찾는 의견이 많다. 세계 휴대폰 시장의 넘버원 브랜드였던 노키아는 애플보다 10년이나 앞서 스마트폰을 개발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사업부와 일반 휴대폰사업부 간 갈등이 깊어지면서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의 트렌드를 놓치고 말았다.
◇외풍에 흔들리는 한국 기업의 경영권=해외에서 안정적인 경영권에 기반한 오너 경영의 장점에 주목하는 것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기업 오너의 경영권을 흔들려는 움직임이 거세다. 역대 정권마다 오너 경영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제도 개선 등을 추진해왔다.
최근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상법 개정안도 그중 한 예다. 법무부의 상법 개정안은 자산 2조원 이상인 상장사에 대해 집행임원제도 도입을 의무화하고 최고경영자(CEO)가 이사회 의장을 겸임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도가 도입되면 기존 이사회는 의사결정과 감독 업무만 갖게 되고 업무 집행은 CEO나 최고재무책임자(CFO) 등 집행임원이 맡게 된다.
이에 대해 재계는 상법 개정안이 오히려 기업의 경쟁력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에서는 무엇보다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수적인데 집행임원제를 의무화하는 것은 이사진과 집행임원 간의 갈등을 초래해 경영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집행임원제도를 법으로 의무화한 나라는 전세계에 한 곳도 없고 심지어 집행임원제를 도입한 미국과 일본에서도 기업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있다"며 "이번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기업의 경영 효율성을 크게 떨어뜨릴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병일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은 "이번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기업 지배구조의 획일화를 초래해 기업 경영활동의 전략적 공간을 지나치게 좁힐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식 오너 경영의 장점을 살려라=전문가들은 국내 산업계가 지속 가능한 '100년 기업 시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한국식 오너 경영의 장점을 되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지금처럼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선제적 투자에 나설 수 있는 기업만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도 "경영환경이 어려운 시기에는 오너 경영이 성과가 더 좋다"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경기침체기 기업 생존전략' 보고서를 통해 미래를 위한 지속적인 투자가 불황을 기점으로 기업의 성패를 갈랐다고 진단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GMㆍ도요타 등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이 일제히 연구개발(R&D) 투자를 줄인 것과 달리 현대ㆍ기아차는 R&D 투자를 늘렸고 그 결과 세계 시장 점유율이 눈에 띄게 상승했다. 선제적인 투자를 앞세워 일본과 대만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라선 우리 액정표시장치(LCD) 산업 역시 강력한 오너십 체제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배상근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국내 기업들이 '100년 기업'을 넘어 장수기업으로 영속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정적인 경영권 확보가 필수"라며 "경영권 방어장치인 '차등의결권' 도입이나 과도한 상속세 완화 등 기업의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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