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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해를 보내며

매년 말이 되면 여러 매체에서 ‘한해를 보내며’로 시작하는 글들을 보게 된다. 하루를 보내며 혹은 한달을 보내며와 같은 송사는 없으되 한해를 보내며라는 애틋한 별사는 많다. 한해를 보내는 애틋한 마음은 여러 명목의 송년회에서도 드러난다. 자리가 송년회이니만큼 연단에 선 사람들이 ‘송구영신’의 덕담을 한마디씩 건넨다. 송년회 장소에서야 비로소 한해가 다 갔음을 느낀다는 말들이 비단 과장만은 아닌 셈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따지자면 12월29일에서 30일이 되는 것이나 31일에서 1월1일이 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냐마는 사람이란 숫자의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비단 날짜뿐만 아니라 나이에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사람들은 숫자로 표기된 것의 변화에 예민하다. 어떤 송년회 자리에서 소설가 김훈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송구영신이라는 말이 참 수상합니다.” 김훈은 낯선 것이 가고 새로운 것을 맞는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게 아닐까 반문한다. 새로운 것은 시간 자체일 뿐 인간사에서 낯선 것을 죄다 버릴 일은 없다고 말이다. 김훈 선생의 말에서 나는 시간의 변화무쌍이 아닌 무변을 읽는다. 낯선 것과 낡은 것을 가르는 힘, 시간은 지대한 무변함으로 그 사소하고도 중대한 것을 구분해낸다. 세상 이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수록 숫자에 무심해지는 것도 이와 관련될 것이다. 지난해 있었던 송년회와 올해의 모임이 다르지 않고, 한해의 변화가 그다지 격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숫자가 바뀐다 해도 삶의 내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삶의 내용이 달라지지 않는 이상 숫자의 변화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시간이 조금씩 가르쳐주는 것이다. 연대기를 기록함에 있어 십년 단위의 구분이 필연적인 것은 어쩌면 이 지루한 삶을 입증하는 증표일지도 모른다. 탄생 10주년, 창립 50주년과 같은 십년 단위 연대기의 관습은 그런 인위적인 구분이 없다면 맥없이 지나쳐버릴 나약한 기억력을 반증한다. 흥미로운 것은 개인의 삶에 대한 추억, 사적 연대기는 10년 단위의 공적 기록과는 달리 매우 사소한 기점으로 나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첫 키스, 이별, 첫 아이의 탄생과 같은 일들로 삶은 구분되고 나뉘어져 하나의 연대기가 된다. 어쩌면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작업 자체는 사적인 추억으로 구성한 지리멸렬한 추억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기록들은 대개 10년 단위로 요약되는 사건들을 담아낸다. 역사의 기록들은 채집과 선택을 원칙으로 삼지만 배제의 원리로 작동될 수밖에 없다. 역사는 사소한 것을 배제한 중대한 기록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반면 소설이나 영화는 기록에서 배제된 사소한 것들 가운데서 중요한 반추의 지점들을 만들어낸다. 거시 역사의 뜰망에서 새어 나온 사소한 것들로 소설은 풍요로워진다. 삶이 지속되는 한 이야기는 계속될 수밖에 없고,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이 곧 죽음이라는 깨달음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한해가 갈 때마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송구영신의 문구들은 어떤 의미에서 개인의 내밀한 삶과 전혀 무관한 관습적 췌사일지도 모른다. 한해를 추억하며 수많은 공공 영역에 별사와 영사가 오가지만 추억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다른 곳에 은닉돼 쌓여간다. 한해의 삶은 다사다난과 같은 사자성어로 정리될 수 없는 추억일 것이다. 말로 정리할 수 없는 것들과의 조우, 매듭질 수 없는 것과의 대면, 어쩌면 이 애매함이야말로 낯선 한해를 맞이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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