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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중심街路 만들자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은 무학대사는 조선왕조 도읍지로 한양을 천거했지만 왕궁터를 결정할 때에는 삼봉(三峰)의 반대에 부딪힌다. 태조는 결국 삼봉의 손을 들어줘 지금의 경복궁으로 정궁(正宮)터를 결정하는데 훗날을 알았을까. 경복궁터는 장자 승계가 어렵다는 말을 무학대사가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궁궐 중에서도 으뜸이요, 가장 아름답다는 경복궁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280여년 간을 폐허로 방치돼 오다 고종에 이르러 대원군이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해 중건되는데 이마저도 한일합방 이후 일제에 의해 많은 전각이 헐려 나간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정궁의 일부가 철거되고 난 자리에 국권 상실의 표본인 조선총독부가 들어선 것이다. 일본인에 의해 수난을 당하던 경복궁은 해방 후 우리들의 손에 의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 스스로가 훼손하는가 하면 궁궐의 고풍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물을 세워 궁궐을 아래로 내려다본다. 로마에서는 베드로 대성당이 보이도록 도시를 계획하고 이 보다 높게 건축물은 세우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우린 몰랐던가. 우여곡절 끝에 일제의 잔재라는 총독부 건물도 철거되고 경복궁 복원도 이제 곧 빛을 발하게 된다. 광화문에서 보는 백악(白岳)의 경관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북한산 보현봉과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백악과 인왕산을 감싸고 청와대가 웅지를 틀어 경복궁에 나아가는 모습은 `백악춘효(白岳春曉)` 진경산수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광화문에서 남쪽을 쳐다보자.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세종로를 나누고 있는 가로수 분리대와 성웅(聖雄)의 동상이다. 무릇 삼라만상도 제 자리가 있는 것처럼 동상 역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더욱 의미를 발하는 게 아닐까. 가로수 분리대는 한가운데 에서 동서를 가르고 있지만 길섶으로 조금 물러서서 파리 `샹제리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런 분위기를 좀 연출하면 좋지 않을까. 그리하여 경복궁 앞길도 저 장안의 주작대로(朱雀大路)처럼 세종로를 확 트이게 열어줄 수도 있으리라. 경복궁과 서십자각이 복원되고 콘크리트 모조품 광화문이 원래의 단아한 목조 건물로 태어나 제자리를 찾는 날 우리는 비로소 육백년의 역사를 되찾는다. 이제 손에 손 잡고 세종로 한복판에서 광화문과 북악산을 배경으로 유유자적 사진찍고 대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아름다운 대궐의 곡선미를 음미하면서 영화롭던 과거를 찬탄해 보자. 월드컵때 남대문에서부터 1,000만 시민이 열광하던 시청앞 광장을 거쳐 광화문 광장을 연결하는 우리나라의 상징거리, 국가 중심가로를 한 번 만들어 보자. <최재범(서울시 행정2부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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