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사원인 A씨는 인근 건물의 은행에 근무하고 있는 B씨와 교제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A씨에게 걱정스러운 일이 한 가지 생겼다. 연인인 B가 자신을 만나지 않는 날마다 연락이 안 됐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그 시간은 저녁 7시에서 12시 사이. 그럴 때마다 B는 주말 근무가 있다, 회사 체육대회가 있다, 외근이 있다 등등의 이유를 이야기하며 A를 만날 수 없는 원인을 미리 설명해 두었던 터였다. 하지만 A는 “의심을 멈출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전화 한 통, 10초도 채 걸리지 않는 메시지조차 못 보내는 게 말이 되냐”면서. 결국 그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려 ‘자기 마음대로 통제가 안 되는 B’에 대한 하소연을 하는 것은 물론, 더 반복되면 그녀와 헤어질까 생각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괴로워하는 A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A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하는 B를 원망스러워 하기도 했다. 그렇게 A는 친구들 사이에서 연인 때문에 속 썩는 남자, B는 졸지에 매너 없는 여자가 됐다.
의심이 모두 나쁜 것이라고만 얘기할 수는 없다(비록 어감은 부정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A의 의심은 원래 ‘합리적인 추론’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정 시간대에 계속해서 전화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업무에 집중해서’, ‘가방에 넣어 놔서’라니 한두 번도 아니고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게다가 A가 문제 제기를 할 때마다 B는 ‘우리 사이에 신뢰가 없다’며 오히려 가슴을 졸인 A를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A가 친구들에게 하소연하는 방식에도 적잖은 문제가 있다. 일단 친구들은 A가 겪은 모든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이 이슈에 대해 A의 시선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A의 친구들에게 주어진 정보는 A가 이야기한 게 전부니까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A와 가까운 사람들은 당연히 그에게 동조하게 되어 있다. 사실 A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같은 고민을 여러 번 하면서 자신의 의심을 확신으로 몰고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정황들까지 퍼즐처럼 짜맞추며 의심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는 식으로. 그러다 보면 B의 행동은 단순 부주의 또는 진짜로 집중해야 할 다른 일이 있어서 벌어진 잘못일 수 있어도 A의 눈에는 그저 변명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의심으로 인해 벌어진 참담한 비극을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에서 찾아보자. 오셀로는 측근의 음모로 부인에 대한 의심을 계속했던 나머지 그녀를 살해하고 만다. 그는 원래 베니스의 해군 제독으로 부와 영광을 거머쥔 인물이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출신 무어 인이라는 열등감이 내재돼 있었다. 말하자면 ‘외국인 노동자 출신 장군’이었으니까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 열등감은 어쩔 수없는 것이었다. 반면 부인 데스디모나는 본토 베니스 인이자 원로원 의원의 딸이었다. 그렇다 보니 항상 주변의 질시가 뒤따랐다. 오셀로의 부관 이야고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고는 오셀로의 자리를 차지하고픈 욕심에 그들의 결혼 선물을 훔쳐 부인을 불륜의 주인공으로 위장시켜 버린다. 그리고 상담자의 명분으로 오셀로의 귀에 속삭이며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그가 부인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의심은 강화(reinforcing) 기제가 있다. 덫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계속해서 한쪽 방향으로만 생각하게 한다. ‘합리적 추론’으로 시작한 의심이라고 할지라도 비합리적으로 변하게 되는 건 한순간이다.
극단적인 오셀로 이야기를 꺼낸 것은 A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A는 B와 허심탄회하게 대화해야만 한다. ‘나를 왜 못 믿느냐’며 의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이별을 통보받는 최악의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꼭 해야 한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의견을 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연애는 결국 두 사람 간의 일이다. 주변 사람은 그의 의심이 합리적 추론인지 또는 자의적인 편집과 해석이 정도 이상으로 들어간 비합리적 의심인지 판단해 줄 수 없다. 연애 상담을 권하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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