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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순수·욕망·광기… 원작 충격 고스란히 담은 '채식주의자'

소재 선정성에 기대지 않는 안정적 연출·연기 돋보이는 수작<br>채민서, 일약 연기파 대열 합류… 예산한계 불구 촬영도 일품


영화 '아바타'가 관객수 1,100만명, 매출액 1,000억원을 돌파하는 위용을 자랑하는 이때 한국산 저예산영화 한 편이 관객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한강의 이름을 깊이 각인한 소설 '몽고반점'을 영상화한 '채식주의자'. 돌연 채식주의를 선언하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혜(채민서)와 예술과 욕망, 현실의 언저리에서 방황하는 민호(김현성)를 통해 순수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광기와 집착과 혼란 등을 담고 있다. 평범한 삶을 살아온 영혜가 돌연 채식주의를 선언한다. 그녀의 갑작스런 변화가 남편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은 당황스럽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던 어느 날 아버지가 영혜에게 육식을 강요하며 폭력을 휘두른다. 급기야 영혜는 발작을 일으키며 과도로 손목을 긋는다. 비디오아티스트인 민호는 계속되는 슬럼프에 괴로워하던 중 아내로부터 처제인 영혜가 스무 살까지 몽고반점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강렬한 예술적 영감과 욕망에 사로잡힌 그는 남편과 이혼한 처제에게 자신의 비디오작품에 알몸으로 출연할 수 있는지 묻는다. 2005년 서점에서 우연히 '몽고반점'을 읽은 후 전기에 감전된 듯 큰 충격을 받았다는 임우성 감독은 그 즉시 원작자인 한강을 만나 판권을 따낸 후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4년 반을 넘겨서야 영화로 완성될 수 있었다. 아마도 임 감독의 제안을 받은 제작사들은 '몸 담론의 정수를 보여주며 잃어버린 순수성을 되찾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정신적 집착과 추구를 다룬 뛰어난 예술 소설'이라는 이상문학상 심사위원의 다소 '무거운' 평가가 맘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감독은 아직도 이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사를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시나리오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임 감독은 '나는 이걸 왜 하려고 하는 걸까' 하는 생각으로 회의에 빠졌다. 그런데 최근 임 감독은 민호의 열정과 광기, 영혜의 아픔, 지혜(김여진)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는 "세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할지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면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감독의 이런 언급은 '채식주의자'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인간 행동의 모호함과 혼란에 대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의 행동이 순수함을 향한 몸부림인지, 아니면 단순한 욕망의 표출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사람들이 살아가며 일상적으로 겪는 혼란을 표현하는 것인지 규정하기 힘든 장면이 잇따라 등장하기 때문이다. 채식이 언제나 육식보다 순수하고 몽고반점이 마냥 순수함을 상징한다는 식으로 그려졌다면 이 영화는 참으로 도식적이고 심심해졌을 것이다. 임 감독은 영혜의 몽고반점을 '성인의 몸에 남은 순수성'이라고 설명하지만 민호의 몽고반점에 대한 집착은 결국 처제를 향한 욕망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감독의 발언에서 순수함이 뛰어 놀 영역을 확장하고 싶은 욕망도 얼핏 읽을 수 있다. 임 감독이 이런 예술적 욕망을 맘껏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준 일등공신은 채민서다. 채민서는 모종의 꿈을 꾼 후 고기냄새 때문에 참을 수 없다며 채식주의자가 된 후 다시 식음을 전폐하고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여자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설득력이 있다는 건 과장되긴 했지만 그녀의 행동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누구나 살면서 이유 없이 미치고 싶은 순간이 있기 마련 아닌가. 영화 '가발'로 연기파 배우에 대한 욕망을 내비친 바 있는 채민서는 이 영화로 그 욕망을 마침내 실현한 것처럼 보인다. 광기와 우울, 희열, 평안을 오가는 그의 연기는 앙상한 몸과 합쳐져 기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영화 속 채민서의 행동은 불편하고 때론 괴롭지만, 연기자로서의 채민서는 이 작품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편안하게 보인다. 조금만 벗어나도 과장스럽게 보였을 영혜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채민서의 연기가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저예산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여배우를 비롯한 배우들의 몸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도 상찬할 만하다. 8kg을 뺐다는 채민서의 벗은 육체는 때론 매혹적이지만 거북한 감정을 동시에 안긴다는 점에서 요염하지 않고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다. 10kg을 찌워 뱃살 아저씨로 변모한 김현성의 몸도 마찬가지다. '두뇌유희 프로젝트, 퍼즐'의 매끈한 김현성과 '채식주의자'의 김현성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가 유명 작가의 원작소설을 충실하게 각색했으되 고만고만한 문예영화에 그치지 않고 관객들의 뇌리에 여운과 함께 여러 잔상을 남기는 건 순전히 임우성 감독의 능력 때문이다. 신인감독답지 않게 깊고 차분한 그의 시선 덕에 이 영화는 순수와 욕망과 예술 등을 향한 인간의 집착과 혼란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스크린 위에 안정적으로 그린 수작이 됐다. 물론 영화의 공기가 숨 막힐 정도로 무겁고, 지나치게 꼭 맞아서 마치 끼는 것처럼 느껴지는 옷을 입은 것처럼 영화 전체적으로 여유가 없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3억5,000만원이라는 순제작비로 소재의 선정성에 기대지 않는 영화가 탄생한 이유는 원작에서 받은 감흥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진심이 작품에 투영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촬영기간은 한 달에 불과하지만 5년 가까이 이 작품을 놓고 고민했다는 감독의 고군분투를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촬영팀도 마땅히 박수를 받아야 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이런 때깔의 화면을 뽑아내기란 쉽지 않다. 장훈 감독의 '영화는 영화다'와 함께 화면의 맵시가 꼭 제작비와 비례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부족하지 않은 영화로 기억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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