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못해 그렇지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한국의 주력업종 가운데 하나인 유화산업의 심장부 여수국가산업단지. 이곳은 지금 한전의 전력공급 시스템에 대해 폭발 직전의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최근의 정전사태로) 유화단지가 무차별 폭격을 맞은 것 같은데 한전의 허락 없이는 전력설비를 함부로 건드릴 수조차 없습니다. 그저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까지 들리는 이야기는 현장의 관리소홀 때문이라는 ‘한전식 변명’뿐입니다. 한전 민영화 얘기가 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현지 A업체의 한 직원) 여수 산단은 지난 3일부터 사흘 간격으로 발생한 두 번의 정전사태로 한화석유화학ㆍ여천NCC 등 일부 공장들의 가동이 중단됐다. 공식적인 피해액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매출액 기준으로 최소한 1,000억원대의 피해가 불가피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천NCC 제3공장 등의 일부 공정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복구되지 않고 있다. 서울경제 취재팀이 현지를 방문한 9일 여천NCC 제3공장의 굴뚝 위로 시커먼 연기와 불꽃이 넘실거렸다.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면 불꽃과 연기는 나오지 않지만 공장이 멈추면 공정 도중의 찌꺼기를 연소시키는 시스템이 자동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여천NCC 굴뚝의 연기와 불꽃은 여수산단이 현재 정전으로 멈춰서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단적인 상징이다. 동시에 현지에 입주한 기업들의 들끓는 심사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같이 어이없는 정전사고는 왜 일어났을까. 한국전력 측은 ‘기업의 피뢰기 및 변압기 관리부실’을 1차 원인으로 꼽고 있다. 3일 발생한 1차 정전은 한화석화 수전소 내의 피뢰기가 파손되면서 시작됐고 6일의 2차 정전은 여천NCC 내의 변압기 고장으로 일어났다는 것. 하지만 공단에 입주한 기업들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발했다. 이곳의 B업체는 “한전이 전력공급 및 관리를 잘못했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한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며 “전력 전부를 차단한 ‘턴 어라운드’ 점검 때도 아무 이상이 없었고 평소 한전의 관리지침을 따랐는데 갑자기 관리책임 운운하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1차 정전사고 촉발점으로 지적된 한화석화 피뢰기가 고장 났을 때 한전의 지역발전소인 호남화력발전처 발전설비 일부가 멈춰선 것으로 드러났다. (호남화력은 여수시의회 사고현황 보고 문건에서 ‘1차 사고발생 직후 저전압으로 발전이 정지됐다’고 적시했다) 피뢰기 파손이 어떻게 발전소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의문스러운 상황이다. 정부는 현재 지식경제부 공무원 등 9명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해 이번 정전사고의 원인규명을 위해 정밀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여수산단공관리공단 측은 귀띔했다. 하지만 현지 기업들은 합동조사단에 대해서도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이곳의 한 관계자는 “합동조사단 9명 대부분이 한전 출신이거나 한전 자회사 소속 인사들”이라며 “결과가 뻔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특히 “(현장 설비 신증설 등) 각종 인허가와 검사 등에서 한전이 사실상 감독권을 행사하는데 할 말이 있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차라리 그냥 조용히 넘어가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