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경험·실패도 연구 자산… 가시적 성과만 너무 매달려
'될것'에 대한 연구 지원보다 '될까'에 투자하는 풍토 필요
이공계 기피 현상 줄이려면 일자리 많이 만드는게 우선 "과학은 정책적 변수에 흔들려서는 안 돼요. 정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정책을 내놓고 다시 시작한다면 항상 제자리만 맴돕니다." 과학비지니스벨트 논란을 예상이라도 했을까. 지난달 말 미국 보스턴 현지에서 만난 박홍근(사진) 하버드대 교수가 일관되게 강조한 과학정책의 핵심은 일관성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학정책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면 결국 정책이 우리 과학 발전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박 교수는 "과학정책은 쌓여서 결과를 만든다"며 "정치적 이해관계라는 변수가 정책을 흔들고 기초과학에 영향을 미친다면 우린 과학 선진국을 계속 부러워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최초(1901년)의 지하철인 'T'를 타고 도착한 보스턴의 하버드역을 빠져나오자마자 스마트폰의 구글맵부터 쳐다봤다. 몇 년 전 와본 길이지만 1m가 넘는 눈 속에서 길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드릴 말씀도 별로 없는데…. 먼 길을 어렵게 오셨습니다"라며 인사를 건넨 박 교수의 첫 인상은 청바지에 편한 재킷을 걸친 젊은 연구원의 모습이었다. 박 교수의 명함에는 남들은 없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전공이 2개다. 그것도 전혀 생소할 것 같은 화학과 물리학 겸임 교수다. 또 다른 하나는 주소. 통상 하버드대 이공계 교수들이 사이언스 홀에 연구실을 두고 있는 반면 박 교수는 '코넌트 랩'이라는 독립적인 연구 공간을 가지고 있다. "2년 전 하버드에서 독립적인 연구동을 새로 지어줬다"며 "실험실과 연구실, 그리고 강의실이 한 건물에 다 있어 효율적인 연구활동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코넌트 랩은 미국의 화학자이자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제임스 코넌트의 이름을 딴 연구동이다. 박 교수는 '재미 있는 실험'을 좋아한다. 화학과 물리학의 경계를 오가는 것도 호기심의 확장이다. 스탠퍼드대에서 박사를 마치고 로런스버클리국립 실험소에서 포스닥(박사 후) 과정을 거친 박 교수가 하버드로 온 이유 중 하나도 자유로운 연구 활동 때문이었다. 그는 "하버드에 온 후 3년 동안 논문도 안 쓰고 하고 싶은 공부를 했다"며 "관심 있던 뇌 연구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 하버드 의대에서 강의를 듣고 토론도 하며 지냈다"고 말했다. 박 교수가 3년 동안 연구 준비를 하는 동안 대학은 박 교수의 연구에 대한 가능성에 연구비를 조건 없이 지원했다. 박 교수는 "단분자 트랜지스터를 연구하다 뇌 연구 쪽으로 분야를 넓히게 된 이유는 재미 있을 것 같아서였다"며 "연구주제가 변경돼도 지원해주는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일반적으로 큰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정량적 분석이 필요하지만 뇌 연구에는 아이디어만으로도 지원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도 아이디어만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박 교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글쎄 한국도 상황이 많이 좋아졌죠. 예전에는 기초과학도 추격형이었던 만큼 아이디어만으로 지원을 받기가 어려웠지만 이제는 가능성이 조금 더 확대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박 교수는 한 우물을 꾸준히 파기보다는 다양한 영역에 대한 연구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과학자 중 한 명이다. 현대과학에서는 많은 경험을 쌓아야 연구주제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조심스럽게 한국의 과학정책에 대한 의견으로 화제를 돌려봤다.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됐고 한국에서 연구도 하지 않는데 곤란한 질문"이라면서도 박 교수는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평가 시스템에 대해 솔직한 비판을 했다. 그는 "시스템이 갖춰진 선진국과 달리 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일방적이고 사무적인 평가에 의존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물론 무조건 퍼주기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라며 "성과에 대해 무섭고 냉정하게 평가하되 기초과학 연구에서는 '될 것'에 대한 연구보다는 '될까' 하는 연구에 지원을 해주는 풍토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기초과학 평가 시스템이 응용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에만 매달린다는 지적이다. 그는 "실험을 진행하다 실패하면 세상이 끝난 것처럼 호들갑스럽다"며 "실험에 대한 실패도 연구 자산이고 실패가 쌓이면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 과학정책 얘기를 한참 하다 박 교수가 먼저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이공계 기피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라며 "하버드의 경우에도 첫 입학생들은 대부분 법대나 의대를 지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공계 기피의 가장 큰 문제는 졸업을 하고 갈 곳이 없다는 것"이라며 "연구활동을 위해 석사ㆍ박사에 지원하는 인력은 사실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공계 대학의 정원을 줄이자는 얘기일까. 박 교수는 "한국 대학이 과포화 상태인 것이 분명하고 경쟁력 부문에서 뒤떨어지는 것도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며 "그렇다고 지금 당장 기업 인력구조조정 하듯 대학을 구조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공계 기피의 원인이 졸업하고 갈 곳이 없는 것이라면 이공계 학생들이 졸업하고 갈 수 있는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주는 것이 우선"이라며 "화학과를 나왔다고 화학 회사를 다니고 수학과를 나왔다고 수학 관련 업무를 하기보다는 인문대와 마찬가지로 이공계를 졸업한 학생도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전 10년 동안 아이비리그 이공계 졸업생들의 월가 진출이 이공계 학생들이 다양한 일자리를 찾는 한 방식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아이비리그 한국 이공계 유학생들의 월가 진출을 두고 이공계 기피의 또 다른 사례인 것처럼 소개하지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공계 공부를 한 모든 사람이 연구소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8년 이전 10여년 동안 국제 금융시장에서 '퀀츠(quants)'라고 불리는 아이비리그 출신 수학자들이 득세했다. '수량으로 잴 수 있는'이라는 뜻을 가진 퀀터테이티브(quantitative)'의 약자로 계량할 수 없는 것을 계량화한다는 뜻이다. 헤지펀드와 은행은 거액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면서 재능 있는 수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시했다. 한때 200명을 넘었던 아이비리그 이공계 출신 한국인 퀀츠들은 금융위기 이후 6~70명 남짓으로 줄기는 했지만 월가에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시간여의 인터뷰를 마치고 박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을 보여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20명이 넘는 연구원과 학부생이 오가는 코넌트 랩은 한쪽은 박 교수의 걸작인 단분자 트랜지스터를, 또 다른 한쪽은 박 교수가 하버드에 온 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뇌과학 기초연구를 하고 있다. 지난해 4월 하버대 의대팀이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백혈병암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도 박 교수의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박 교수는 "쥐를 보여주면서 설명하면 더 알아 듣기 쉬울 텐데…"라며 아쉬움을 표한 뒤 "쉽게 말해 세포들끼리 어떤 의사소통을 하는지 알아내 백혈병ㆍ암 등 나쁜 세포들의 증식 원인을 찾아내 치료법을 만들도록 도와주는 연구"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반도체에 6개 정도의 세포를 심어 의사소통을 알아내던 것을 100개ㆍ1,000개까지 가능하게 했다. 세포들의 의사소통을 더 잘 알아 들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든 셈이다. 박 교수는 "세포들 간의 신호전달체계를 좀 더 연구한다면 뇌 과학에도 획기적인 발전이 있을 것"이라며 "미지의 분야에 대한 연구만큼 과학자에게 즐거운 일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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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에 '슈퍼컴' 들어가고 한번 충전으로 1년 사용도 최신형 컴퓨터에 들어가는 중앙처리장치(CPU)인 인텔 코어 i7 980X에는 11억7,000만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간다. 데스트톱에 들어가는 반도체로는 가장 덩치가 큰 것이 그래픽처리장치(GPU). 특히 엔비디아 GTX 480은 무려 30억개의 트랜지스터로 구성된다. 트랜지스터 하나의 크기가 수십 나노미터(100억분의1m)로까지 부피가 줄어들었다해도 CPU안에 트랜지스터를 나란히 세우면 3m가 넘는다. 박홍근 교수가 지난 2000년 세계적 과학저널인 '네이처'에 발표한 단(單)분자 트랜지스터는 크기가 1나노미터다. 이것이 상용화된다면 인텔의 CPU는 1만분의1 크기로 줄어든다. 쉽게 말해 시계 안에 슈퍼컴퓨터가 들어가고 한 번 충전으로 1년을 사용할 수 있는 꿈의 노트북이 가능하다. 단분자 트랜지스터는 두 전극 사이에 분자 하나를 넣고 이를 조작하면 분자가 스위치 역할을 해 정보를 처리한다. 이때 전극 사이를 오가는 것은 오로지 전자 하나. 전자 하나로 정보를 저장한다고 해서 단전자 트랜지스터로도 불린다.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 트랜지스터가 과학잡지 네이처를 통해 공개되자 당시 '뉴욕타임스'에도 크게 보도했다. 당시 네이처지는 이 연구에 대해 "원자 하나가 트랜지스터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며 "당장 단전자 트랜지스터를 실용화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나노전자소자를 개발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후 3년이 지난 2003년 6월 박 교수는 바나듐 분자로 정보를 더 입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획기적인 단분자 트랜지스터를 만들어 네이처에 커버스토리로 소개됐다. 단분자 트랜지스터의 최대 장점은 부피가 적을 뿐 아니라 1억개의 전자가 이동하는 일반 트랜지스터와 달리 전자 하나만 이동해 전력 소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상용화 될 경우 태양전지를 이용한 충전만으로도 충분한 전자제품이 속속 등장하게 된다. 단분자 트랜지스터는 생명공학의 발전에도 엄청난 기여를 한다. DNA나 생화학무기를 검출할 수 있는 분자센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DNA를 검색을 위해 증폭하는 시간을 센서를 이용해 획기적으로 줄였다. 피 한 방울이면 즉시 유전자를 검색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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