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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산책] 토정 이지함의 애민정신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

겨울이 점점 깊어간다. 올 한해도 저물어가고 있다. 다사다난하고 괴로운 한해였다. 이렇게 2004년이 기울고 있으나 서민의 고통지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불황의 한파는 깊어가는 겨울과 더불어 서민의 생존을 더욱 위협하고 있다. 이 비정하고 가혹한 연말에 전기요금과 버스ㆍ택시요금, 쓰레기봉투 값 등 서민생활과 직결되는 공공요금이 또다시 무더기로 오른다는 달갑잖은 소식이다. 새해에는 고교 수업료도 오르고 서민과 애환을 함께하는 담뱃값도 오른다고 한다. 환율은 계속 붕괴하고 주가는 급락하고 있다. 거리를 배회하는 실업자는 좀처럼 줄어들 줄 모르고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경제정책 당국은 이렇다 할 신통한 처방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고위공무원들, 정쟁(政爭)으로 해를 보내는 국회의원들의 봉급과 세비를 고통분담 차원에서 10분의1 정도로 깎아버리고 싶은 것은 한두 사람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위정자가 서민의 고통을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 나라의 장래가 어찌 밝기를 바라랴. 도대체 이 나라에 서민의 눈물을 닦아줄 지도자가 있기는 한 것인가. 토정(土亭) 이지함(1517~1578)을 떠올리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작자요, 기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경륜을 펼친 청백리요, 경제와 과학의 중요성을 일찍 깨달은 실학사상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토정이 당시로서는 다 늙은 56세의 나이에 겨우 종6품 포천현감직에 나선 것은 재물이 탐나서도 아니고 출세에 눈멀어서도 결코 아니었다. 오로지 가난한 백성을 위해 남은 힘이나마 한번 쏟아놓고 가겠다는 순수한 인간애ㆍ동포애의 발로였다. 선조 6년(1573) 토정이 포천에 부임하자 아전들이 상다리가 휘어지게 저녁상을 잘 차려 내왔다. 물끄러미 상을 내려다보던 토정이 말했다. "먹을 것이 없구나!” 잘 차린 음식상을 보고 먹을 것이 없다니 아전들이 다시 상을 차려 올렸으나 여전히 똑같은 소리였다. 토정이 이렇게 타일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활이 넉넉지 못한데도 음식에 절제가 없고 또 앉아서 편히 먹기를 좋아하니 큰일이다. 나로 말하자면 음식을 상에 담아 먹는 것도 과분하게 여기는 바이다.” 그리고 잡곡밥과 나물국 한그릇씩만 가져오게 해 맛있게 먹었다. 그가 아산현감에 부임한 것은 선조 11년(1578). 신관 사또 토정은 관내를 한바퀴 돌아보고 거지가 너무 많은 데 놀랐다. 거지뿐 아니라 병자와 노약자도 많았다. 그래서 만든 것이 걸인청(乞人廳)이라는 거지 수용소였다. 고을을 거지 소굴로 만들려 하자 아전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반대를 했다. 그러자 토정이 이렇게 말했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따뜻이 보살피는 것이 수령의 본분이다. 내가 걸인청을 세우려는 것은 불쌍한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해 양민으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도 집과 땅을 갖게 해 잘 살게 하려는 뜻이다.” 그렇게 걸인청을 만든 토정은 수용한 걸인들을 그냥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고 일을 시켰다. 노약자와 병자는 짚신을 삼거나 새끼를 꼬는 쉬운 일을 시켰고 젊고 튼튼한 거지들은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아다가 팔게 했다. 그밖에 손재주가 있는 자들은 도구를 마련해주고 수공업에 종사하도록 했으니 그야말로 일하지 않고는 먹지도 말라는 산교육이었다. 또한 일손이 달리는 농번기에는 거지들을 동원해 모내기와 벼 베기를 시켰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저축을 해 자립의 밑천으로 삼도록 했다. 그러니까 토정 이지함은 이미 400여년이나 앞서 이 땅에서 잘살기 운동, 새생활 운동, 새마을 운동을 시작한 선구자였던 셈이다. 충남 아산시 영인면은 그 옛날 토정 이지함이 현감으로 재직하던 현청 소재지. 그가 걸인청을 만들고 새마을 운동을 실천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영인면사무소 앞뜰에는 토정의 사심 없이 지극한 애민정신을 기리는 동상이 서 있다. 서민은 갈수록 살기 힘겹다고 비명을 지르고 노숙자는 늘어가는 이 비정의 세모에 입으로만 국민을 위한다고 떠드는 고관과 정치인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한쯤 찾아가보고 또 가슴 아리도록 느끼는 바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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