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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믿지 못할 것. 뭘까. 19세기 중후반의 답은 이랬다. '열차시각표.' 최초의 도시간 철도인 리버플~맨체스터 구간이 개통(1830년)된 후 철도는 세계 각국에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지만 신뢰도는 바닥이었다. 독일 시인 하이네가 '공간이 살해 당했다'라고 읊었을 정도로 빠른 속도가 지방시(local time)의 차이를 드러나게 했기 때문이다. 철도 등장 전까지 사람들은 어디서든 해가 뜨면 아침이고 지면 저녁이라는 시간개념 속에서 살았으나 철도로 빠른 이동이 가능해지면서 시차가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특히 국토가 넓은 미국이 그랬다. 남북전쟁 직전 미국의 철도 총연장은 3만626㎞로 세계 최장. 전후에는 더욱 속도가 붙어 1880년에는 9만3,301㎞로 늘어났지만 새로운 혼란이 나타났다. 카우보이나 세일즈맨들은 서쪽으로 18㎞ 이동할 때마다 시간을 1분씩 늦춰 계산해 각 지방시에 맞췄으나 뻗어나는 철도망으로 시간기준이 혼동에 빠졌다. 300여개에 이르는 지방시를 100개로 줄여봐도 철도시각표를 짜고 읽는 게 난수표 작성과 해독처럼 어려웠다. 혼란이 진정된 것은 1883년 11월18일. 미국과 캐나다 철도업자들이 시카고에 모여 네 가지 기준(서부ㆍ중앙ㆍ산악ㆍ태평양)에 따라 각각 1시간씩 차이가 나는 철도표준시를 도입하면서부터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시간을 철도업자들에게 맡길 수 없다'는 저항도 잠시. 신뢰성을 확보한 철도는 1900년 총연장 30만9,350만㎞로 뻗어나가며 미국경제의 발전을 이끌었다. 지금도 사용되는 세계표준시가 1884년 도입된 것도 철도표준시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서다. 철도표준시는 관행과 이해관계에 얽힌 혼란을 합의와 이행으로 극복한 대표적인 사례다. 약속을 저버리는 '백년대계'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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