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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에] "우리와 상관 없잖아요"

입시에 찌든 청소년들에게 역사전쟁은 딴 세상 이야기



"뭐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교과서가 또 바뀌는 거잖아요. 저야 괜찮지만 이제 공부할 애들은… 글쎄요."

대학입시를 준비 중인 아들에게 최근 사회를 둘로 완벽하게 갈라놓은 역사교과서 논쟁에 대한 입장을 물어봤더니 예상외의 답변이 나왔다. 찬성 또는 반대가 아니라 교과서가 바뀌면 수학능력시험을 볼 때 새로 공부해야 하는 게 부담되지 않겠냐는 대답이었다. 순간 깨달았다. 우리 아이들에게 모든 것은 '기-승-전-입시'라는 것을. 기성세대들은 진보니 보수니 하며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지만 정작 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중요한 것은 올바른 역사도, 친일 여부도 아닌 시험 출제 여부라는 것을. '내게 여자 친구는 사치 같아'라는 어느 광고의 문구처럼 역사 인식의 문제는 입시에 지쳐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사치에 다름 아닌 듯하다.

돌이켜보면 기자도 어릴 적 그랬던 것 같다. 중학교 때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당시까지만 해도 정식 교과과목이었던 한문 교과서에 빨간 밑줄을 진하게 그어 둔 한자들이 있었다. '한국적 민주주의(韓國的 民主主義)'. 중간고사든 기말고사든 시험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왔기에 죽자 살자 외우고 다녔다. 이 한자들이 교과서에 들어가 있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대학생이 된 뒤였다.

이런 청소년에게 역사인식이 없다고 비판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을까.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동료를 밟고서라도 이기라고 그래서 돈 많이 버는 직장을 얻어야 한다고 다그쳤던 게 우리다. 이런 입시·취업 만능 사회에서 아이들이 과연 제대로 된 역사 수업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2017년부터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수능에도 출제하겠다고는 하지만 주입식 교육이 역사인식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정 또는 검정 교과서가 수능에 미치는 영향을 두고 여야가 공방을 벌이는 촌극도 벌어진다. 여당이 국정으로 전환하면 교과서 한 권만 공부하면 되기 때문에 시험 부담이 줄어든다고 주장하자 야당에서는 세부적인 문제가 출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수능시험이 어려워질 것이라며 맞받아친다. 청소년에게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깨우쳐줘야 한다는 고민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듯하다. 단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꺾어야 한다는 목적만 존재할 뿐이다.



하기야 어른들의 싸움에 학생들이 피해를 본 게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던가. 선거 때 이구동성으로 무상 급식을 외치더니 이제 와서는 예산이 모자라 밥 못 주겠다 하고 툭하면 교육부와 진보성향 교육감이 신경전을 펼치니 사이에 낀 아이들만 죽을 맛이다. 이러니 가뜩이나 외면받는 공교육이 더 위축될 밖에.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공방은 총선을 앞둔 전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여당은 노동개혁 등 구조개혁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라도 총선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아야 하고 이를 위해 선거 승리의 공식인 보수대결집이 절실했을 터. 당정청이 정국의 블랙홀 부담을 안고 역사 문제를 꺼낸 이유일 수 있다. 야당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입장. 이번에 굴복하면 최대 이슈인 노동개혁 샅바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고 이는 곧 재기 불능을 의미한다. 양측 모두 사활을 걸었으니 대치가 장기화할 게 뻔하다. 벌써 국정교과서 방침에 반발해 진보성향 교육감들이 따로 교과서와 교재를 만들겠다고 하니 아이들만 혼란스럽게 생겼다.

교과서를 직접 대하는 자신들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정치권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 휩쓸리고 저리 흔들리며 우리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과연 자신이 올바른 교과서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다음 입시는 어떻게 준비하면 될까 하는 표정으로 바라볼까. 자꾸 아들이 한 말이 뒷덜미를 끌어당긴다. "어차피 우리랑은 상관없는 얘기잖아요."

송영규 논설위원 sko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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