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범선의 끝판왕, 커티삭





돛단배와 동력선. 둘 중 어느 배가 빠를까. 단연히 후자다. 아무리 비싼 요트라도 모터보트의 속도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눈을 19세기로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바람만 좋으면 범선이 증기기관을 장착한 기선(汽船)보다 빨랐다. 폭이 좁고 대형 돛을 단 고속범선 클리퍼선(clipper)들이 19세기 초반부터 시속 13노트를 넘는 속도로 내달렸건만 증기선은 1843년에서야 대서양 항로에서 시속 10노트의 벽을 넘었다.

미국에서 1852년 건조된 ‘바다의 지배자(Sovereign of the Seas)’호는 오스트레일리아 항로에서 바람과 해류를 잘 만나 시속 22노트(40.7㎞)의 속도를 냈다는 기록도 있다. 영국인들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이름 난 고속범선의 대부분이 미국 선박이었기 때문이다. ‘Sovereign of the Seas’라는 선명도 17세기 바다를 누볐던 영국 군함 ‘바다의 군주’호에서 베껴 간 것이기에 약도 올랐다. 보다 아팠던 점은 당시에도 속도가 곧 돈이었다는 사실. 최고의 돈벌이였던 중국과 차(茶) 무역의 관건이 적재량과 속도였다.

중국 남부에서 생산되는 차의 어린 잎을 얼마나 빨리 영국 시장에 가져오느냐를 놓고 미국 클리퍼선들과 경쟁(Tea Race)하던 영국은 지는 경우가 많아지자 고민에 빠졌다. 증기선 투입은 애초부터 대안에서 빠졌다. 속도가 느릴 뿐 아니라 같은 급의 선박이라면 무겁고 부피가 큰 엔진을 장착하고 막대한 연료(석탄)를 실어야 하는 증기선은 운임과 화물 적재량에서 범선의 상대가 안 됐다. 화주들도 석탄 냄새가 차 맛을 변질시킨다는 선입견으로 증기선을 꺼렸다.

영국의 최종 선택은 최신 기술을 동원한 고속 범선 건조.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하는 조선 기술을 총동원해 1869년 11월23일 새로운 배를 선보였다. 선명(船名) 커티 삭(Cutty Sack). ‘범선 조선술의 정점’으로 불리는 커티 삭 건조에는 일반 클리퍼 건조 비용의 두 배 가량인 1만 6,150파운드가 들어갔으나 정작 성적은 기대에 못 미쳤다. 중국~영국간 티 레이스(차 운송 항로)에 8차례 투입됐건만 번번이 미국 배에 뒤졌다. 고비마다 돛대가 부러지는 불운을 겪은 탓이다. 진가를 발휘한 것은 1884년. 오스트레일리아~영국 양모운반 항로를 67일 만에 달렸다. 순항속도 17노트. 순풍을 맞을 때는 20노트를 낸 적도 있다.



범선 커티삭은 갑자기 잊혀졌다. 증기기관의 발달로 기선의 속도가 시속 20노트 이상으로 빨라진 가운데 1895년 외국에 팔린 후 종적을 감췄다. 커티삭이 부활한 것은 1922년. 반파 상태로 발견돼 관심사로 떠오른 직후에는 범선 시대의 낭만과 향수를 자극하며 ‘커티삭’이라는 상표를 단 위스키까지 나왔다. 그리니치 해양박물관에 실물 전시 중인 커티삭은 2005년 화재로 일부 손실됐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관광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 전설적인 속도 경쟁이 펼쳐지던 범선시대에 대한 동경, 문화재 보관 노력이 어우러져 무형의 상품을 낳은 셈이다.

커티삭의 매각 이후에도 일부 남았던 고속 범선에 대한 관심은 1900년 독일의 프로이센호를 끝으로 명맥이 끊어졌다. 길이 132m의 덩치를 대형 돛 48장에 담은 바람의 힘으로 17노트의 속도를 자랑하던 프로이센호는 8,000톤의 화물적재 능력을 자랑하던 괴물이었으나 1910년 침몰하고 하얀 돛을 단 범선도 세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범선은 과거 속의 박제된 기억에 불과할까. 폴란드가 2000년 건조한 ‘로얄 클리퍼(Royal Clipper)’는 규모가 프로이센과 맞먹는다. 연료 고갈 시대에 봉착하면 범선의 시대가 다시 오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범선 뿐 아니다. 끝없는 대형화·고속화로 치닫던 컨테이선 건조 경쟁에서 최고 속도를 오히려 줄이는 역(逆) 속도 경쟁이 감지된다. 연비를 의식한 역 속도경쟁 역시 본질적으로 속도 경쟁과 다르지 않다. 효율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유한한 자원과 환경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효율을 위해 탄화수소와 속도를 선택했듯이 환경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선택을 강요 당할지 모른다. 범선 시대의 로망에는 궁극의 발전을 향한 인간의 무한 도전과 탐욕, 그리고 그 한계가 동시에 담겨 있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