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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우 칼럼] 한국 대기업, 대만 중소기업

미국의 戰後 동북아 경제 전략에 한국은 반발, 대만은 순응체제로

한국 경제, 미국의 판단미스 입증


세월이 좀 지난 1989년, 대만대표부 직원들과 오찬을 함께하던 자리였다. 서로 자기네 국민의 일상사로 대화를 나누다 한국에서 자가용 차량이 급속히 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대표부 직원 한 명이 대만에서는 동네 식당 주인들이 독일 벤츠나 BMW 승용차로 밀가루 포대나 음식 재료를 실어 나른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중산층에서는 현대자동차에서 개발한 프레스토가 인기 차종일 정도였다. 대표부 직원의 농담 속에는 그만큼 대만 국민소득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요즘 양쪽 집안 사정은 많이 달라진 듯하다. 대만은 지속적인 친중 정책에도 중국 경제 성장의 혜택을 보지 못한 채 10년째 실질임금이 거의 오르지 않고 있다. 산업 공동화는 심해졌으며 내수경기 침체로 민생경제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중국의 성장둔화로 수출마저 부진해 0.8∼0.9%라는 최악의 경제 성적이 예상된다고 한다. 과거 한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국내총생산(GDP) 규모도 지금은 한국의 37% 수준으로 쪼그라든 상태다.

한때 한국과 대만 경제를 비교하는 것이 유행했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도 별로 들리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얼마 전 이근 서울대 경제연구소장이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줬다.

이 소장은 무엇보다 양국의 산업구조에서 반전(反轉)의 실마리를 찾는다. "대만은 중국에 완전히 졌는데 한국은 그나마 소수의 대기업 때문에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대만은 중소기업들이 산업 전체를 이끌어가는 구조인데 반해 한국은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난 후 미국 정부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에 똑같은 경제정책을 실시한다. 그런데도 양국의 경제구조가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데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미국은 애초 패전국 일본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일본의 산업구조를 철저히 해체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중국 대륙을 점령하자 미국은 종전의 동북아 전략을 180도 전환한다. 일본의 국력을 키워 동북아에서의 자본주의 진지로 삼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자면 당연히 일본의 제조업을 육성하는 한편 제품을 내다 팔 수 있는 인접 소비시장을 제공해줄 필요가 있다. 미국 정부가 한국과 대만을 일본 공업의 최적 배후 소비지로 묶어두려 한 배경이다. 농업을 주요 산업으로 삼는 한편 경공업 중심의 경제구조로 가져가자는 복안이었다.

그런 뜻에서 미국은 자신이 제공한 원조를 한국 정부가 산업화의 재원으로 돌리려는 것을 적극 금지했다. 이승만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액을 소비재와 산업화 재원으로 나누는 과정에서 3대7을 고집했으나 미국은 7대3 이상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한국민의 공업화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농업개발에 주력해 우선 식량 부족문제부터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더해 공산품 부족은 자기네가 주는 달러로 일본에서 수입함으로써 물가안정이나 도모하라는 것이 그들의 기본 입장이었다.

1960년대 초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미국의 정책은 달라지지 않았다. 케네디 정부는 한국의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포항제철 등 국가기간 산업 육성에 대해 끝까지 반대했다. 그럴 돈 있으면 기존 공장들이나 수리하고 소비재 중심의 공업을 발전시켜 비교우위의 상품을 수출하는 것이 낫다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악착같이 대기업 육성정책을 밀고 나갔다. 미국 정부의 권고 내지 명령을 충실히 따른 것은 오히려 대만이었다. 대만은 미국의 비교우위 정책에 순응해 중소기업을 기반으로 한 공업화를 추진했다. 반면 한국은 공기업과 신진 재벌을 활용해 중화학공업화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대만과 달리 거대한 재벌 체제가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한국과 대만의 치열한 승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 쪽으로 기울고 있음이 명백해지고 있다. 물론 이런 추세가 미래로까지 계속 이어지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한국은 미국 정부의 전후 동북아 경제 전략을 거부했고 나아가 미국의 전략판단이 미스였음을 입증해냈다는 사실이다. 누가 뭐라 해도 한국에서는 아직 중국과의 한판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이 중국에 먹혀버린 대만 경제와의 차이다.

/이신우 논설실장 shinwoo.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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