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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사’ 박용만 두산 회장 경영난국 타개할 승부수는?

주력사업인 중공업 부문에서 구조조정 가속화할 듯 면세점 시장 진출 계기로 소비재 사업 확대 가능성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재계에서 소문난 승부사다. 두산그룹이 겪어온 수많은 위기와 변화의 순간에서 그는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룹의 체질개선과 기업 인수합병을 진두지휘하며 소비재 중심 기업이던 두산을 중공업 위주의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선봉장이 바로 그다. 최근 각종 악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두산그룹은 다시 한 번 승부사 박용만 회장의 능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과연 박 회장은 어떤 승부수를 던질 것인가. 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조부인 박승직 창업주께서는 보부상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룹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감정을 저도 느끼고 싶습니다.”(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지난 1월 말 대한상의 주최 전략회의 후 인터뷰에서)

지난 1월 말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지인들과 함께 경남 창원 주남저수지로 향했다. 지난 2004년부터 이어온 전국 도보 일주를 위해서였다.

지난 2004년 11월 당시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이었던 박 회장은 젊은 직원들과 함께 이른바 ‘배땅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박 회장의 조부인 박승직 두산 창업주의 발자취를 따라가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배땅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전국 도보 일주’였다.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 상점’이 설립됐던 종로 4가 배오개부터 해남 땅끝마을까지 약 550km를 걷는 배땅 프로젝트는 2년여간 이어졌다. 당시 박 회장과 직원들은 주말을 활용해 틈틈이 20~30km씩을 걸었고 2006년 8월 해남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박 회장은 틈틈이 짬을 내 전국 도보 일주에 나섰다. 지금까지 박 회장이 걸은 거리만 해도 무려 1,300km에 육박한다. 올해는 창원에서 시작해 상반기까지 남도 횡단을 마무리짓고, 하반기부터는 부산에서 강릉에 이르는 동해안 일주에 나설 계획이다.

박 회장이 전국 도보 일주를 시작했던 2004년은 두산그룹의 명운이 달린 중요한 해였다. 당시 두산그룹은 기존 소비재 중심 기업에서 중공업 기업으로의 사업구조 전환을 당면 과제로 삼고 있었다. 이를 위해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차례로 인수하며 본격적인 신호탄을 쐈다. 당시 재계에서는 두산그룹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시기에 박 회장이 선택한 전국 도보 일주를 놓고 다양한 해석을 쏟아냈다.

두산 출신 관계자 A씨는 말한다. “처음 박 회장이 전국 도보 일주를 하게 된 계기는 당시 받았던 디스크 수술 때문이었습니다. 재활 차원에서 걷기 운동을 해보자는 것이었죠. 동시에 창업주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며 그룹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했던 박 회장의 평소 생각도 반영된 결정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두산그룹은 소비재 중심에서 중공업 중심 기업으로의 체질 변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었죠. 박 회장은 당시 체질 변화가 향후 두산그룹의 100년을 책임질 수 있는 긍정적 변화가 되길 바랐습니다.

저희는 박 회장의 전국 도보 일주를 이른바 ‘도보 경영’이라고 말했어요. 전국 도보 일주는 독특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박 회장의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난 행보였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배땅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진행됐던 두산그룹의 사업구조 전환 프로젝트 역시 성공했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두산그룹에 드리운 먹구름을 뚫기 위해서일까. 박용만 회장은 올 초 다시금 전국 도보 일주를 위해 신발 끈을 고쳐맸다. 물론 그사이 박 회장은 꾸준히 전국을 누비며 도보 일주를 이어왔다. 하지만 올해는 과거와는 조금 다른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주력 사업인 중공업 분야의 매출 하락, 신입사원 희망퇴직 논란이라는 부정적 이슈부터 면세점 사업권 획득이라는 긍정적 이슈까지, 두산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대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박용만 회장은 2016년 전국 일주 ‘도보 경영’을 통해 난국을 타개할 승부수를 찾을 수 있을까?


박용만 회장이 전국 도보 일주에 나선 까닭
두산그룹은 올해로 창립 120주년을 맞이한 명실공히 국내 최고(最古) 기업이다. 지난 1896년 서울 종로4가 배오개에 문을 연 ‘박승직 상점’으로 출발한 두산그룹은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국내 대표 소비재 중심 그룹이었다.

그랬던 두산그룹이 지금의 중공업 중심 기업으로 탈바꿈한 데는 ‘인수합병(M&A)의 귀재’로 불리는 승부사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의 역할이 컸다.

지난 1996년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두산그룹은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을 목표로 대대적인 사업 재편에 착수했다. 특히 두산그룹의 상징이었던 OB맥주의 매각은 충격적인 결정이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다는 두산 출신 관계자 B씨는 말한다. “1996년 초 두산그룹을 이끌던 오너 일가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부터 박용오, 박용성, 박용현, 박용만 등 형제 전원이 참석했죠. 당시 두산 일가는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에서 내놓은 리포트에 주목했어요. 두산그룹의 부채비율이 높으니 주요 자산을 매각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죠. 박 명예회장은 동생들에게 한국3M, 한국네슬레 등 합작회사의 지분과 을지로 본사 건물을 매각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박 명예회장의 지시를 들은 동생들은 별다른 반발 없이 이를 따랐습니다. 그들 역시 두산의 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이후 두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OB맥주 매각도 별다른 문제 없이 이뤄졌습니다. 일련의 과정에서 주목받은 인물이 바로 당시 두산그룹 전략기획실장을 맡고 있던 박용만 회장이었습니다. 주력 사업 매각은 물론, 이후 진행된 각종 M&A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스스로 능력을 입증했으니까요.”

두산그룹의 사업구조 전환을 이끌며 단숨에 M&A 전문가로 급부상한 박 회장의 능력은 사실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두산그룹의 성장, 위기, 그리고 극복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쌓은 노하우가 뒷받침됐다.

박 회장의 M&A 전략은 큰 틀에서 ‘유연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우리 조건을 무조건 관철해야 한다’는 불도저식 협상보다는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안이 나올 때까지 마라톤 협상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의 패를 예측하고 다양한 상황을 예상해 그에 맞는 적절한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노력이 뒷받침된다.

무엇보다 박 회장이 M&A 전문가로 불리게 된 진짜 이유는 그가 단순히 수많은 M&A를 성공시켰기 때문만은 아니다. 박 회장은 M&A를 하나의 경영 수단으로 정착시킨 상징적 존재다. B씨는 말한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 두산그룹의 부채비율은 당시 30대 그룹 중 5~6위 수준이었습니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국내 내로라하는 경제 전문가들은 외환위기로 사라지거나 추락할 기업 목록에 어김없이 두산그룹을 포함시켰죠. 물론 절반 가까운 사업을 매각하며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벌어졌죠. 외환위기 이후 두산그룹은 오히려 외환위기 이전보다 더욱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두산그룹보다 부채비율이 낮았던 기업들이 사라질 때, 오히려 두산그룹은 더욱 탄탄한 사업구조를 갖추며 살아남았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경영전략의 핵심에는 박 회장이 중심이 된 M&A가 큰 역할을 했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두산그룹은 2000년까지 OB맥주 등 주력 계열사 매각을 완료하고 중공업 그룹으로 재탄생했다.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완벽한 변신에 성공했다. 그 결과 매출도 껑충 뛰었다. 1996년 4조 원 수준이었던 그룹 매출은 중공업 기업으로 사업구조 전환이 완료된 지난 2008년에는 23조 원대를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10여 년 만에 5배 이상 매출이 늘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사이 우여곡절도 있었다. 형제경영의 좋은 예로 정평이 나 있던 두산그룹은 지난 2005년 그룹 회장 교체를 둘러싼 이른바 ‘형제의 난’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오너 일가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두산은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선언하고 전문경영인을 앞세운 책임경영 체계 마련에 집중했다. 물론 M&A를 통한 두산의 경쟁력 강화 전략은 그대로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두산 성장 이끈 M&A의 귀재
M&A를 통한 박용만 회장의 승부수가 또 한 번 빛을 발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으로 재직하던 박용만 회장은 지난 2007년 당시 국내 기업 M&A 역사상 최대 규모(49억 달러)로 기록된 미국 중장비 업체 밥캣의 인수에 성공했다. 당시 밥캣 인수는 단순히 ‘최대’라는 상징성뿐 아니라 국내 기업의 글로벌 M&A 무대 데뷔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B씨는 말한다. “박 회장이 밥캣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점은 인수 3~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두산인프라코어의 전신인 대우종합기계 인수를 준비할 때였죠. 대우종합기계 인수를 기반으로 건설 중장비 시장 진출을 노렸던 박 회장은 그때부터 일찌감치 해외 시장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요. 문제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려면 일단 자체적으로 기술을 개발해 성장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었죠. 박 회장은 아예 해외 기업을 인수해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후 밥캣을 인수 타깃으로 선정하고 기업 분석에 착수했죠. 물론 밥캣이 매물로 나올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저 미리 준비를 해보자는 것이었죠.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밥캣이 매물로 시장에 나왔습니다. 사전 학습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밥캣 인수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두산이 인수합병한 해외 기업은 모두 관련 분야의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다. 발전소 보일러, 건설장비, 수처리, 터빈설계 등 굵직한 사업에서 핵심 원천기술을 확보한 두산은 보다 수월하게 글로벌 시장 진출을 이뤄낼 수 있었다.

박용만 회장 주도하에 진행된 두산의 잇따른 M&A 성공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몇몇 기업들은 두산의 M&A 노하우를 정리한 보고서를 만들어 임원회의 자료로 활용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박용만 회장은 리스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기업이나 시장이라면 과감히 M&A 목록에서 지워 내려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지난 2008년 대우조선해양 M&A 포기다. 당시 두산은 대우조선해양의 가장 유력한 새 주인 후보로 평가받고 있었다.

박용만 당시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 역시 “회사 내부 자금력과 대우조선해양의 경쟁력을 따져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며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의지가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두산은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발을 뺐다. 이런 결정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대우조선해양 M&A 과정에 관여했던 관계자 C씨는 말한다. “박 회장과 두산 측이 대우조선해양에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국 인수전에는 불참했죠. 물론 충분한 실탄이 확보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큽니다. 잇단 M&A로 많은 비용을 지출한 두산으로서는 8조 원 이상으로 추정됐던 대우조선해양의 매각가가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박 회장이 조선업에 대한 불확실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당시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점차 고조되는 상황이었거든요. 조선업의 경우 글로벌 경기에 매우 민감하죠. 글로벌 금융위기가 장기화될 가능성에 주목한 박 회장은 리스크가 큰 조선업보다는 기존 핵심 사업인 중공업에 집중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실제로 두산은 대우조선해양 인수전 불참 선언 이후 노르웨이의 대형 덤프트럭 생산 업체 ‘목시(MOXY)’를 인수했습니다. 2016년 현재까지 대우조선해양이 주인을 못 찾고 남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박 회장의 당시 결정이 정확했다고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글로벌 경제위기는 예상보다 오랜 기간 지속됐다. 글로벌 건설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자연스레 중공업 위주의 기업으로 탈바꿈한 두산그룹도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주력 계열사인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건설의 실적 악화로 지난해 두산그룹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73% 감소한 2,645억 원에 그쳤다. 그나마 두산그룹의 지주회사인 ㈜두산이 신성장동력인 연료전지 분야에서 활약하며 실적을 이끌었지만, 중공업 부문의 실적 악화가 뼈아프게 작용했다.

지난 2012년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한 박용만 회장 역시 길어지는 글로벌 경기침체를 타개할 돌파구 마련에 고심했다. 그리고 박 회장은 또 한 번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다. 1996년 이후 접었던 소비재 분야에 다시금 도전장을 던진 것이었다.


‘경박단소 전략’으로 반전 노린다
산업계에서 통용되는 단어 중에 중후장대(重厚長大)와 경박단소(輕薄短小)라는 말이 있다. 무겁고 두터우며 길고 큰 것을 의미하는 중후장대는 조선업, 건설업 등의 산업을 일컫는다. 반면 가볍고 얇으며 짧고 작음을 뜻하는 경박단소는 흔히 바이오, 소비재, 음식료, 소프트웨어 등의 산업을 의미한다.

애당초 두산그룹은 소비재 중심의 경박단소 전략으로 성장했다. 물론 이후 중공업이라는 중후장대 전략으로 지금의 도약을 이끌어냈지만 한편에서는 경박단소 전략을 펼쳤던 과거를 떠올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체질 변화에 성공한 두산 내부에서 과거를 그리워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두산이 매각한 소비재 기업들이 승승장구했기 때문이었다. OB맥주의 경우 매각 후 연평균 15%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두산그룹 계열사 SRS코리아에서 운영해온 햄버거 브랜드 버거킹 역시 지난 2013년 매각된 후 실적 상승을 이뤄냈다. 그런 의미에서 두산그룹이 최근 면세점 시장에 진출한 것은 다시금 경박단소 산업을 통해 도약을 노리겠다는 박 회장의 포석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박 회장 자신도 면세점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찾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며 면세점 사업 진출에 사활을 걸었다.

일각에서는 박 회장의 면세점에 대한 관심을 단지 사업적 측면에서만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한다. 동대문이라는 지역이 두산에 어떤 의미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1905년 개설된 동대문시장의 모태는 익히 알려진 대로 두산그룹 창업주 박승직이 설립한 광장주식회사다. 광장시장을 운영했던 광장주식회사와 박 창업주가 앞장서서 동대문시장의 터전을 닦았다. 두산그룹 역시 지난 1998년 말 동대문에 있는 현재 두산타워로 사옥을 옮기며 본격적으로 동대문 시대를 열었다. 동대문으로 사옥을 옮긴 이유 역시 창업주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오너 일가의 의지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두산타워 내에 있는 쇼핑몰 ‘두타’는 침체일로를 걷던 동대문 상권을 살리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타와 같은 대형 쇼핑몰의 등장도 동대문 상권의 완벽한 부활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박용만 회장은 동대문 상권이 곧 두산그룹의 정체성과 직결된다는 강한 믿음으로 동대문의 부활을 위해 다양한 해결책 마련에 고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박 회장은 ‘면세점 유치’라는 승부수를 꺼내 들었다.

박 회장의 이 같은 결정에 대다수 업계 전문가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단 한 번도 이 분야에서 사업을 해본 적이 없는 두산이 과연 면세점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지 물음표를 던졌다. 하지만 박 회장은 단호했다. 우선 동대문 지역 상권 활성화와 균형발전을 이루겠다는 명목으로 사재 100억 원과 회사 자금 100억 원을 투입해 동대문미래창조재단을 출범시켰다. 동대문미래창조재단 출범식에 참석한 박용만 회장은 재단 출범이 면세점 유치를 겨냥한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면세점 사업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두산그룹이 면세점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었을 당시, 일각에서는 박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이라는 직책을 활용해 유리한 구도를 만들지 않겠느냐는 목소리가 나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정부와 대기업을 향해 쓴소리도 할 줄 아는 대한상의’라는 모습을 보였다. ‘눈치 안 보고 할 말은 하되,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박용만 회장의 이미지가 면세점 사업자 선정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목소리도 들린다.


면세점 사업 안착에 그룹 역량 집중
신규 면세점 사업자에 선정됐지만, 두산은 여전히 위기의 연속이다. 건설과 중공업 시장은 여전히 불황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박 회장이 손수 키운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는 구조조정에 나섰고, 유동성 확보를 위해 알짜배기 사업인 공작기계 부문 매각을 결정했다. 게다가 올 초 불거진 두산인프라코어 신입사원 희망퇴직 논란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사람이 미래다’라는 두산의 광고 문구를 비꼬는 ‘사람이 노예다’, ‘명퇴가 미래다’ 등의 말들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현재 박용만 회장은 위기 타개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박 회장은 올 초 신년사를 통해 중국 경기 둔화 영향 확대, 미국 금리 인상에 따른 국제자금 흐름 변화. 중동 지역에서의 지정학적 갈등, 기후변화에 대한 새로운 국제규범 등이 기업 활동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하며 이에 걸맞은 선제적 대응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박 회장이 내놓을 또 다른 승부수는 과연 무엇이 될까? 우선 오는 5월 오픈 예정인 면세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기존 사업자와 달리 면세점 운영 노하우가 전혀 없는 두산이 어떤 방식으로 면세점 시장 안착에 성공할지가 관전 포인트다.

이미 두산은 면세점 사업권을 잃은 SK네트웍스의 면세점 운영 시스템과 인천 영종도에 있는 보세물류창고를 인수하는 협상을 진행하며 ‘노하우 구매’에도 나섰다. 면세점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명품 브랜드 유치에 우선 성공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두산이 명품 브랜드 입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지만, 두산 측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두산 내부에서는 면세점의 차별화를 위해 신규 오픈할 면세점을 심야 면세점이나 사후 면세점(물건을 구매한 외국인이 출국할 때 공항에서 부가가치세와 개별소비세를 돌려받도록 해주는 면세점)으로 운영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소비재 사업 확대를 위해 관련 기업들을 대상으로 M&A를 진행할 가능성도 있다.

면세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두산그룹의 핵심 사업인 중공업 분야에서의 실적 개선이다. 특히 중공업은 박 회장이 애정을 갖고 키운 사업이다. 박 회장 스스로도 중공업만큼은 반드시 정상궤도에 올려놓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

핵심은 선택과 집중이다. 계열사 몸집 줄이기와 유동성 확보로 그룹 전반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력 계열사의 핵심 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정대로 KDB대우증권 애널리스트는 “박 회장이 글로벌 경기불황의 해법으로 선제적 대응을 강조한 만큼 그동안 잠잠했던 박 회장의 기업 M&A 전략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며 “핵심 사업인 두산인프라코어의 건설기계와 엔진, 두산중공업의 플랜트 사업을 양대 축으로 중공업 사업을 재편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용만 회장이 풀어야 할 당면 과제는 두산그룹의 재도약이다. 그가 카멜레온 같은 M&A 전략, 승부사적 기질을 앞세워 두산그룹이 당면한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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