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이나 다름없는 삼성그룹이 탈퇴를 공식화면서 56년 역사의 전국경제인연합회는 해체를 향한 브레이크 없는 내리막길을 달리게 됐다. 오는 23일 정기총회가 열릴 예정이지만 전경련 내부에서는 기업들과 여론이 요구하는 쇄신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해체론을 부채질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는 전경련의 소멸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왜곡돼 있던 정치권력과 기업의 관계를 바로잡고 기업의 목소리를 모을 단체를 단일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이미 삼성·현대자동차·SK·LG처럼 전경련 회비의 70% 이상을 내는 주요 그룹과 KT·산업은행·수출입은행·기업은행 등 회원사가 이탈하면서 전경련 도미노 탈퇴는 가속화하고 있다. 탈퇴의 직접적 원인은 최순실씨가 사실상 사유화한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기업들의 기금 출연을 전경련이 주도한 데 있다. 하지만 지난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일해재단 강제모금 사례부터 2002년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지원까지 전경련이 깊숙이 개입하면서 정경유착의 핵심 고리라는 비판을 받는 게 기업들이 등을 돌리는 근본 이유다.
더욱이 전경련은 지난해 12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 회장의 잇단 탈퇴 선언 후에도 쇄신안을 두고 오락가락하며 해체위기를 자초했다. 전경련은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과 합병해 연구전문기관으로 거듭나는 방안이나 기업을 대변하는 단체로 남는 방안 등을 검토했지만 결정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내부에서는 오랫동안 전횡을 일삼고 미르·K스포츠재단 기금 모금을 주도한 이승철 상근부회장이 오히려 쇄신의 주체로 나서는 상황에 대한 불만도 많다”고 전했다. 이 상근부회장은 임기가 만료되는 허창수 전경련 회장(GS그룹 회장)과 함께 이달 총회를 통해 퇴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전경련은 이달 총회를 열고 신임 회장단을 선출해야 한다. 그리고 5월까지 약 600개에 이르는 회원사로부터 회비를 걷어 한 해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회장단 선출과 쇄신안 작업이 진척을 보지 못하면 회원사들이 우르르 탈퇴해 해체가 현실로 닥칠 가능성도 크다. 벼랑 끝에 선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현재 주요 기업 총수들은 전경련 회장 취임을 고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련 안팎에서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의 선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특히 쇄신을 위해 한덕수 전 국무총리 등 원로나 관료·학계 출신 인사가 차기 회장을 맡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전경련에 남은 주요 기업들은 전경련의 행보를 주시하며 탈퇴를 검토하는 형편이다. SK그룹 관계자는 “최 회장이 탈퇴 선언을 한 후로 회비도 안 내고 회의도 참석하지 않고 있다”며 “전경련이 사단법인이기 때문에 따로 탈퇴 절차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CJ그룹은 전경련 탈퇴 결정을 유보하면서 상황을 좀 더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손경식 CJ그룹 회장은 전경련이 재계의 싱크탱크로 거듭나는 방안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포스코그룹과 한화그룹·두산그룹·금호아시아나도 입장 발표를 미룬 채 전경련의 쇄신안을 기다리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정희 정권의 산업 발전정책에 협조할 목적으로 1961년 탄생한 전경련이 시대적 소명을 다한 만큼 이제는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역대 정권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끊지 못한 전경련을 소멸시키고 기업들의 대외 소통창구를 단일화하자는 목소리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전경련은 일부 대기업의 목소리만을 반영하는 한계가 있었다”며 “외국의 사례를 따라 전경련 대신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모두 아우르는 대한상공회의소로 기업들의 소통창구를 통일하는 게 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이종혁기자 2juzs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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