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6일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러시아 땅을 밟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초청장을 받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3회 동방경제포럼(EEF)에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다음날 포럼 기조연설을 통해 “우리 철도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연결은 유라시아대륙과 해양을 이어주는 통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동북아시아는 세계 최대의 에너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며 “그리고 이는 유럽연합(EU)처럼 동북아경제공동체와 다자안보체제로 발전하는 밑바탕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철도·전력·가스·항만·북극항로·조선·일자리·농업·수산 등 9개 분야의 협력을 핵심으로 하는 우리 정부의 ‘신(新)북방정책’에 대한 소개였다. 공을 많이 들인 제안이었지만 한국과 러시아·중국·일본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온 현장 참석자들의 반응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북한이 제6차 핵실험을 강행한 지 불과 4일째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 들어 한반도 정세는 급변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남북 정상회담이 두 차례나 열렸고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까지 개최됐다. 비록 현재 북미 비핵화 협상이 시원스레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협상 타결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국제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현실화한다면 그다음은 당연히 ‘경제협력’이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EEF는 물론 지난 6월 한러 정상회담, 지난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줄곧 강조해온 동아시아철도공동체 구상과 이를 구심점으로 한 남북 및 동북아 경제협력이 가시권에 들어오게 된다.
동아시아철도공동체 등 한반도를 넘어 극동·유럽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경협 구상이 한낱 ‘뜬구름’이 아닌 실현 가능한 ‘시나리오’로 여겨지면서 한국·러시아는 물론 일본·중국·몽골 등 극동에 걸친 각국의 반응도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는 지난달 28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주최로 열린 한러 심포지엄에서 남북관계의 점진적 발전을 언급하면서 “이 같은 상황에서 남한·북한·러시아 3각 경제협력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쿨릭 대사는 “문 대통령이 제안한 동북아철도공동체 이니셔티브를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하고 있다”며 “문 대통령이 교통·물류 협력을 통해 집단안보 구조의 근간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한 점은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덧붙였다.
한반도 정세 급변으로 한국의 ‘신북방정책’과 러시아의 ‘신동방정책’에 힘이 실리고 남한·북한·러시아 3각 또는 남한·북한·미국·러시아 4각 협력 가능성이 커지면서 중국과 일본도 극동에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북쪽 국경지대와 동해안을 중심으로 경제특구 개발 구상을 하고 있어 극동 협력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가는 초반 주도권을 잡는 데서 밀려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푸틴 대통령이 2015년 EEF를 창설한 후 처음으로 오는 11일 개막하는 제4회 EEF에 참석한다. EEF가 단순한 극동개발 경제포럼이 아닌 극동 다자 경제협력 논의의 장으로 역할이 커지면서 시 주석도 눈을 돌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시 주석의 이번 동진(東進) 행렬에는 700명이 넘는 정치·경제 군단이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북미·북중관계 진전 속에 내부적으로 ‘재팬 패싱론’ 비판을 받았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블라디보스토크 방문에 공을 들이고 있다. 한국과 북한에서는 이낙연 국무총리와 김영재 대외 경제상이 각각 참석한다. 러시아·중국·일본과 달리 정상은 아니지만 이 총리와 김 대외경제상은 이번 EEF에서 큰 주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오는 18~20일 3차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리는데다 북미 간 친서 외교가 재가동되면서 한반도 정세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북 평화와 협력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극동 발전의 한계는 명확하다. 특히 이 총리의 블라디보스토크행에는 국내 유력 대·중소기업 사장단이 대규모로 동행해 극동 협력에 대한 한국의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줄 것으로 알려졌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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