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에는 ‘피맛골’이라는 골목이 있다. 조선시대 백성들은 고관대작의 행차 때 가던 길을 멈추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이런 의식이 싫었던 백성들이 가마 행차를 피해 모인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머리를 조아릴 필요까진 없지만 대법원에서는 요즘에도 비슷한 일이 왕왕 벌어진다. 지난달 어느 날 대법원 복도를 지나가던 길에 누군가가 갑자기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기자를 향한 대법원 직원의 외침이라는 것은 세 번의 고성이 더 들린 후에야 깨달았다.
옆으로 살짝 몸을 옮긴 후 이유가 궁금해져 뒤를 돌아봤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한 대법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직원은 대법관의 진행경로에 방해가 될 수 있는 기자를 서둘러 옮기기 위해 고성을 질러댄 것이다. 대법관은 넓고 텅 빈 복도를 홀로 독차지한 채 유유히 청사를 빠져나갔다. 황당한 얼굴로 직원을 쳐다봤으나 그는 “뭔 일 있느냐”며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검찰청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한 고위 검사가 나올 때 기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비켜섬’을 강요당했다. 그 길은 평소에 사람들이 오고 가는 일반적인 통로일 뿐이었다.
고위 법조인이 지나가기 전 미리 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별도의 의전 매뉴얼이 있는지 문의했으나 그런 것은 없다고 했다. 다만 지방법원과 달리 ‘대법원’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직원들이 과하게 행동했을 수 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법조계 내에서 ‘법조인’과 ‘국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신변 보호를 위한 것이었다면 급박하게 소리를 지를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경호했어야 했다.
최근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서 판검사·변호사, 법원·검찰 공무원 등 법조계 종사자들은 여전히 법조계를 ‘가장 믿을 만한 조직’이라고 응답했다. 법조계를 ‘일반사회보다 더 믿을 수 없다’고 응답한 일반 국민들의 생각과는 큰 차이가 있다.
법원과 검찰은 여전히 사법부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들만의 세상에 갇혀 있다. 현장에서부터 법조계가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특권의식을 바꾸지 않는 한 정부가 외치는 사법·검찰개혁은 요원하다. nice8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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