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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이곳-'1987' 연희네 슈퍼] 카세트 선물에 까르르 웃던 김태리 목소리...귓전에 울리듯 생생

전남 목포시에 여행지로 꾸며놓은 슈퍼

과자, 생필품 전시...안쪽엔 '김태리의 방'도

맞은편 '의상 대여점'선 교복 빌려입고 인증샷

김태리가 거리를 활보하는 장면을 포착한 영화 ‘1987’의 스틸 컷




김태리(28·사진)는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20대 여배우 중 한 명이다. 1,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영화 ‘아가씨’의 주연 배우로 발탁되면서 충무로에 데뷔한 그녀는 첫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생생한 표현력과 독창적인 극 해석 능력을 보여줬다. 데뷔작에서 빛나는 연기를 보인 뒤 작품 운이나 감독 복이 없어서, 혹은 너무 일찍 재능이 소진되면서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영화 ‘1987’는 김태리의 지속 가능한 생명력과 상업적 저력을 동시에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30여년 전 뜨거웠던 6월 항쟁의 기억을 그린 이 영화에서 김태리가 연기하는 대학교 신입생 연희는 학생운동을 하는 동아리에 들어오라는 선배 이한열(강동원)의 권유에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라고 냉소한다. 방구석을 연예인 사진으로 도배하고 처음 나가보는 미팅에 설레는 연희는 머리 아픈 세상일보다 가슴 두근대는 청춘 사업에 관심이 가는 스무 살 소녀다. 그런데 이 소녀, 시곗바늘이 골백번 돌아도 좀체 아물지 않는 상처를 품고 있다. 밀린 월급을 주지 않는 사장에 맞서 단체행동을 준비하던 아빠는 홧김에 술을 퍼마시고 교통사고로 죽었다. 교도소 교도관인 외삼촌(유해진)은 노조 설립을 시도하다가 파면된 후 가까스로 일자리를 되찾았다. ‘까불면 다친다’는 처세의 기본 명제를 너무 일찍 터득했기 때문일까. 소녀는 연대의 손길이 간절한 선배를 뿌리치며 차갑게 덧붙인다. “가족들 생각은 안 해요? 꿈꾸지 말고 정신 차리세요.”

사진 촬영을 하며 활짝 웃고 있는 김태리 /연합뉴스


장준환 감독이 만든 ‘1987’의 이 장면은 전남 목포에서 촬영됐는데 당시 배경으로 등장한 ‘연희네 슈퍼’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사랑에 보답하듯 관광지로 변모해 한창 여행객을 맞고 있다. ‘1987’은 상업영화로는 다소 모험적인 서사 구조를 지닌다. 관객의 확실한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주인공을 한두 명 내세우는 대신 검사·언론인·대학생 등 여러 인물이 이어달리기하듯 치고 빠진다. 영화 앞뒤에 배치된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자칫 혼란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의 뼈대를 잡아준다.

연희네 슈퍼는 이런 ‘1987’의 후반부를 책임지는 공간이다. 목포시 해안로 127번길에 자리한 이곳은 골목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큼지막한 안내판이 보여 쉽게 찾을 수 있다. 슈퍼 안으로 들어가면 방문객들에게 판매는 하지 않는 과자와 장난감, 각종 생필품이 펼쳐져 있고 안쪽에는 소녀 감성이 엿보이는 연희의 방이 자리한다. 오래된 참고서와 나무 책상, 빛바랜 사진들이 여행객들을 추억 속으로 안내한다. 영화에서도 슈퍼와 연희의 방은 바로 이어지는 공간으로 설정돼 있는데 실제로 방 장면은 다른 곳에서 촬영됐다. 하지만 ‘1987’에 나오는 장소와 거의 유사하게 꾸며놓은 덕분에 외삼촌에게 카세트 선물을 받고 까르르 넘어가던 김태리의 웃음소리가 귓전에 울리듯 생생하다. 교도관으로 복직한 후 운동권 인사와 내통한 혐의로 경찰의 손에 끌려가는 외삼촌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도 선하게 그려진다. 좁은 슈퍼만 구경하고 발걸음을 돌리기 아쉽다면 바로 맞은편에 있는 ‘의상 대여점’으로 가면 된다. 1인당 3,000원만 내면 옛날 교복을 빌려 입고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며 오래도록 간직할 사진 한 장을 남길 수 있다.



영화 ‘1987’의 촬영지인 ‘연희네 슈퍼’를 찾은 방문객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있다.


‘연희네 슈퍼’ 내부에 꾸며놓은 연희의 방.


마음의 문을 걸어잠근 연희는 이 슈퍼에서 선배를 매몰차게 돌려세웠는데, 공교롭게도 그녀가 새롭게 변화하고 다시 태어나는 공간도 바로 이 장소다. 눈앞에서 경찰이 외삼촌을 붙잡아가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연희는 어느 날 슈퍼로 배달된 신문을 집어든다. 신문 한가운데 박힌 사진 속에서 선배가 최루탄을 맞고 피 흘리며 쓰러지고 있다. 맥없이 졸다가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사람처럼 연희는 정신이 번쩍 깬다. 마침내 알을 깨고 나온 연희는 좁은 골목을 벗어나 달리고 또 달린다. 그 길의 끝에 시원하게 트인 광장이 기다린다. 강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각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동지들이 있기에 연희는 이제 외롭지 않다. 주눅이 들어 잔뜩 웅크리고만 있던 소녀가 밤하늘의 별처럼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함성에 힘을 보탠다. 그제야 감독은 할 얘기를 마쳤다는 듯 작품의 제목 ‘1987’을 스크린 한복판에 띄우고 엔딩 크레디트(마지막 자막)를 올린다. 영화 ‘1987’은 이렇게 한두 사람의 영웅에게 헌사를 바치는 대신 슈퍼에서 물건을 팔고,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고, 사무실에서 밤낮없이 일하던 우리 모두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글·사진(목포)=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연희네 슈퍼’가 영화 ‘1987’의 촬영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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