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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新공법으로 '기술 랜드마크' 노렸지만..미관만 앞세우다 결국 참사

[최형섭의 테크놀로지로 본 세상] <4>무너진 성수대교

1970년대 한강 다리 붐 막바지에

'선진국 교량' 목표로 과감한 시도

교각 간격 넓은 트러스 공법 첫 적용

기존 다리보다 3~4배 비싸게 짓고도

무사안일·적당주의 탓 15년만에 붕괴

사회 곳곳 안전책임 중요성 일깨워줘

성수대교가 붕괴한 지난 1994년 10월21일 다리가 절단된 지점에서 구조 작업이 이뤄지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 1994년 10월 말. 여느 금요일과 다르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직장인들과 학생들은 출근과 등교에 분주했다. 한성운수 소속 16번 버스는 그날 새벽 기점인 과천 서울대공원 인근을 출발해 종점인 번동으로 향했다. 과천에서 버스에 올라탄 직장인들 가운데 일부는 사당이나 고속터미널에서 지하철로 갈아타 최종 목적지로 향했다. 뒤이어 직장이 신사동이나 압구정동에 위치한 사람들도 우르르 하차했다. 이 부근에서 교복을 입은 일군의 여고생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이 학생들은 아침 일찍 일원동이나 수서동의 집을 나서 마을버스를 타고 신사동까지 와서 16번 버스로 갈아타는 것이었다. ‘강남 8학군’ 열풍을 타고 뒤늦게 이사를 왔지만 관내 고등학교 정원이 다 차는 바람에 한강 건너 성동구 무학여고로 배정된 학생들이었다. 이들을 태운 버스는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를 지나 성수대교 남단으로 진입했다.

이때가 오전7시40분 무렵이었다. 버스가 성수대교 중간 정도에 도착했을 때 쿵 하는 굉음과 함께 10번과 11번 교각 사이의 상부 트러스 용접부위가 무너져내렸다. 무게를 떠받쳐야 할 부위가 무너지자 다리 상판이 내려앉았다. 절단된 상판은 그 위의 승합차 한 대, 승용차 두 대와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다. 붕괴지점에 걸쳐 있던 승용차 두 대는 물속으로 빠졌다. 갑자기 땅이 꺼져버린 것이었다. 16번 버스 운전기사는 큰 혼란에 빠졌다. 눈앞에서 도로가 없어지다니! 그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버스는 붕괴지점에 걸쳐 멈췄다. 앞바퀴는 허공중에 매달려 있다가 서서히 차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결국 버스는 뒤집어지면서 추락했다. 모두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평온한 등굣길은 금세 아비규환의 현장이 됐다.

2018년까지 한강에는 총 28개의 다리가 건설됐다. 이 다리들은 한강의 남쪽과 북쪽을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지금 우리 머릿속의 서울은 한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대도시지만 이러한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은 1945년 해방 이후의 일이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확장으로 한강 남쪽 지역이 대거 편입되면서부터 오늘날 낯익은 형태의 서울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이 이뤄지기 전까지 한강을 건너는 일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명절에 고향에 내려갈 때나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강철교를 건너는 일이 고작이었다. 즉 한강 다리의 중요성은 1960~1970년대 서울이 ‘대서울’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한강 다리가 건설된 것도 이 무렵이다. 한강을 건너는 최초의 다리는 1900년 건설된 한강철교였다. 도로교, 즉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로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광진교와 제1한강교(현재 한강대교)가 전부였다. 1963년 서울시가 한강 이남지역으로 대거 확장하게 되자 더 많은 다리가 필요했다. 1965년 제2한강교(현재 양화대교)가 개통됐고 1969년에는 제3한강교(현재 한남대교)가 지어졌다. 1970년대에만 총 8개의 다리가 놓였다. 바야흐로 ‘한강 다리 붐’이라고 할 만한 시기였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교량은 서울이 하나의 대도시로 기능하기 위해 필수적인 테크놀로지였다.

붕괴 후 복구된 2000년대 성수대교의 모습.


성수대교는 한강 다리 붐 막바지에 지어졌는데 두 가지 측면에서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었다. 당시 한강 다리 건설지(建設誌)를 살펴보면 각 다리를 짓는 데 소요된 공사비가 기록돼 있다. 1969년 제3한강교에는 11억3,000만원가량이 투입됐다. 1973년 영동교의 공사비는 20억6,000만원이었다. 1976년 천호대교는 38억4,000만원, 1978년 행주대교는 27억5,000만원이었다. 그러던 것이 1979년 개통된 성수대교는 무려 115억8,000만원이라는 막대한 공사비가 소요됐다. 이전의 다리들에 비해 3~4배 비싼 다리였던 셈이다. 이렇게 많은 자금이 필요했던 이유 중 하나는 게르버 트러스(Gerber truss) 공법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성수대교는 용접 트러스교로 지어진 최초의 한강 다리였다.

독일인 엔지니어 하인리히 게르버(1832~1912)가 개발한 교량 건설 방식인 게르버 트러스 공법은 기존의 공법에 비해 교각 사이의 간격이 넓어 시원스러운 미관이 장점이었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교각과 교각 사이에 힘을 지탱할 수 있는 경첩(hinge)부위를 뒀기 때문이었다. 성수대교가 개통할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교각 사이가 긴 날씬한 모습” 등 외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공법은 동전의 양면처럼 단점 역시 갖고 있었다. 미적인 측면을 강조하다 보니 설계상 여용성(餘容性)이 거의 없어 사전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붕괴할 가능성이 있었다. 성수대교 붕괴 직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발간한 ‘성수대교 붕괴 사건 원인규명감정단 활동백서’에 따르면 트러스 공법 채택은 ‘미관을 중시한 결과 당시 우리 시공기술로서는 다소 무리한 결정이었다’고 평가했다.



성수대교는 1970년대 후반 한국의 성공적인 경제발전을 상징하는 인공물이었던 셈이다. 기능적인 측면만을 생각한다면 트러스 공법을 채택할 이유가 없었다. 기존의 공법을 벗어나 새로운 기술을 시도해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성수대교의 공사보고서는 ‘성수대교는 과거의 교량 형태에서 과감히 탈피한 새로운 형식의 교량으로서 일찍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선진 외국의 교량 형식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이를 통해 서울의 확장으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 한강에 기술적 랜드마크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목표 중 하나였다.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편의를 넘어선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담게 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리는 그로부터 불과 15년 후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성수대교 참사의 원인은 여러 전문가의 분석을 통해 잘 알려진 편이다. 앞서 소개한 원인규명감정단은 ‘설계 상세 부적절, 제작상의 결함, 유지관리 부재가 공히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결국 교량 건설 및 관리의 여러 단계 중 문제가 없는 지점이 없을 정도로 총체적 난국이었다는 참담한 결론이었다. 이로써 고도성장 시대를 상징하는 테크놀로지였던 성수대교는 한순간에 군부 장기집권이 낳은 뿌리 깊은 문제점, 즉 ‘황금만능, 무사안일, 적당주의’의 대표로 추락하고 말았다. 성수대교의 붕괴는 곧이어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 사고와 함께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이 정말로 안전한지를 뒤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동차나 지하철·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서 내 발밑의 땅이 무너져내릴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성수대교 붕괴 참사 당일 출근길 또는 등굣길에 올랐던 사람들도 역시 그랬을 것이다. 다리가 무너지고 나서야 우리는 누가 그 수많은 한강 다리를 점검하고 유지·관리 책임을 맡고 있었는지 알게 됐다. 부실한 감리제도가 정비된 것도 그 직후의 일이다. 이러한 대규모 참사들은 각종 테크놀로지로 둘러싸인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매일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 지하철과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그들의 땀방울과 노고를 생각해본다. 인간의 노동을 매개로 한 테크놀로지의 연결망이 우리가 생활을 영위하는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근간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서울과기대 교수,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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