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정여울의 언어정담] 걷고 또 걸음으로써 치유되는 마음

작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우울할 때

무작정 걷다보면 거리 풍경 속

미소짓는 내 모습 발견하게 돼

산책이야말로 '최고의 서재'인셈





무슨 수를 써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나는 무작정 어딘가를 걷기 시작한다. 목표지를 정하지 않고, 그냥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는 일 자체에 몸을 맡겨본다. 일상으로부터 뚝 떨어진, 머나먼 장소라면 더 좋다. 걷고 또 걸음으로써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옹이 진 걱정들이 풀려나기 시작한다. 문제 하나에 지나치게 골몰해 자꾸만 자신을 탓하는 나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그때가 바로 산책이 절실해지는 시간이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나는 자꾸만 스스로 타박한다. ‘넌 결국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였나, 이런 것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이런 식의 자기파괴는 문제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의 산책은 나를 괴롭히는 나로부터 도망치는 발걸음이다.



걷고 또 걷다 보면, 내 열망과 걱정으로부터, 내 슬픔과 집착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다는 점이 좋다. 발바닥이 아플 때까지 목이 말라 물을 찾게 될 때까지 걷다 보면, 어느덧 나를 괴롭히던 아까 그 문제가 ‘넘지 못할 산’이 아니라 ‘내가 집착하던 나 자신의 욕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때로는 내 진짜 서재가 책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의 풍경 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떨어지는 낙엽들, 반짝이는 간판들, 웅성거리는 사람들 모두가 저마다의 소중한 사연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책들처럼 다가온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마음을 활짝 열어놓은 채 시작하는 산책에는 그런 마력이 있다. 거리의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특별한 의미를 지닌 채 나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느낌이다. 서로를 관찰하지 않고 지나치기만 할 때 우리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눈여겨 바라보면 그의 걱정, 슬픔, 열망, 미소를 저절로 상상하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아주 평범한 산책을 통해서도 서로에게 의미 있는 타인으로 거듭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익숙한 고향길을 매일 서너 시간 넘게 산책하면서도, 남들은 그저 똑같은 풍경으로 인식하는 월든 호수 주변의 숲길을 아름답고 숭고한 자연의 오케스트라로 바라보았다. 자연의 경이로운 풍경들이 그의 마음속에서는 하나하나 그윽한 울림을 지닌 악기처럼 연주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저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만 같았던 세계를 한없이 낯설게, 끝없이 설레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산책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단 한 번 스쳐 지나가는 사이일지라도, 우리가 이 드넓은 세상에서 무려 한 번이나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행복을 빌어준다면, ‘스쳐 지나가는 행인’이었던 우리는 저마다 ‘아름답고 소중한 타인’으로 변신한다. 산책을 하면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다울수록, 나는 단 하나의 문제에 집착하던 마음의 시선을 내려놓고 정신의 근육을 이완시킬 수 있게 된다. 산책은 오직 ‘내 고민, 내 생각’에만 빠져있던 뇌를 더 깊고 풍요로운 사유의 바다속으로 밀어주는 산들바람 같다.



소로는 고향길을 산책하며 ‘매일 새로운 전망을 얻는 느낌’이라고 고백했다. 오후의 산책은 언제나 어김없이 소로를 낯설고도 신기한 나라로 데려다주었다. 한없이 지루해질 수 있고 권태로워질 수도 있는 삶을, 매번 낯설고 싱그럽게, 새로운 실체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마음을 활짝 열고 하는 산책이다. 걷고 또 걸음으로써 나는 나로부터 도망쳐 세상 바깥으로 여행하고 마침내 다시 나로 돌아오는 일상 속의 작은 세계여행을 떠날 수 있다. 걷기라는 일상의 ‘미니 투어’를 마치고 나면, 마음은 한껏 자라 있고, 빈틈없이 빽빽해서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마음속에는 사유의 여백이 생긴다. 그 싱그러운 여백 속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우울과 집착이 아닌 여백과 휴식 속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볼 용기를 얻는 것이다. 수많은 교통수단이 저마다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걸어다니며 바라보는 세상이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나를 괴롭히는 나로부터 도망쳐 다시 나 아닌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 그것이 오후의 산책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눈부신 기쁨이다. 마음을 활짝 열어 산책하며 만나는 아름답고 낯선 세상, 그곳이 나에게는 최고의 서재이자 살아있는 공부방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