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한국의 국민 과일이다. 사과를 제치고 가장 선호하는 과일 1위에 오른 지 10년이 넘었다. 제사상까지 오른 풍경도 낯설지 않다. 바나나는 인류의 과일인지도 모른다. 독일의 기자 출신 작가 댄 쾨펠는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바나나’에서 창세기의 선악과가 바나나였다는 주장을 펼친다. 구텐베르크 성경 편찬 과정에서 ‘선악(malum)’과 ‘사과(melon)’의 파생어 철자가 비슷해 번역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20세기 이전까지 바나나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희소했기 때문이다.
문헌상 유럽에서 처음 바나나를 매매한 시기는 1633년 4월 10일. 저명한 식물학자이자 약종 판매상인 토마스 존슨이 런던 중심가의 매장에서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존슨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식물도감에도 바나나 그림이 포함돼 있다. 일찍 소개됐지만 바나나는 대중화 근처에도 못 갔다. 운송과 보관이 어려워 비쌌을 뿐 아니라 정숙한 여인들이 먹기에 부적합하다는 인식 탓이다. 일반 시민들이 바나나를 쉽게 접하기 시작한 나라는 미국. 서부의 골드 러시에 뛰어든 사람들을 태운 범선들은 회항하면서 빈 배에 바나나를 싣고 동부 항구에 뿌렸다.
증기선이 일반화하고 냉동기술이 발달하면서 바나나 시장은 세계로 넓혀졌다. 산지인 중남미의 밀림은 바나나 농장으로 뒤바뀌었다. 돌림병이 돌면 농장주들은 새 농장을 지었다. 병원균을 퇴치하기보다 밀림을 깎는 게 돈이 덜 들었기 때문이다. 밀림은 점점 황폐해지고 농장에 투자한 미국계 거대기업들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농부들을 짜냈다. 1928년 콜롬비아에서는 바나나 농장 농부들의 시위를 정부가 진압하는 과정에서 2,000여명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에도 바나나 학살이 생생하게 나온다.
바나나의 문제는 지속 가능 여부. 바나나 돌림병으로 가까운 미래에 크기와 당도, 보관성이 떨어지는 열등 품종을 먹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20세기 초중반에도 우수품종인 그로 미셀이 멸종되고 현재의 캐번디시종으로 대체된 적이 있다. 종의 소멸에 대한 경고는 비단 바나나에 국한된 문제일까. 백 년도 안되는 동안 과일 바나나가 지나온 역사는 종(種)의 다양성과 생명, 씨알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해준다. 인간 군집도 마찬가지다. 다른 나라는 약한 전염병에 한국이 강하다면 항체든 사회 시스템이든 보다 쉽게 만들 수 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오히려 축복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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