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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10년 '전세난민' 각오해야 사전청약 '로또' …"입주지연, 누구도 책임 안졌다"

[관점] 11년 만에 부활하는 사전청약제

입주까지 최장 11년…계약 포기 속출· 희망고문 폐해

文정부, 대선정국서 생색내고 뒷감당은 차기 정부 몫

대기기간 단축이 관건…일정 준수 제도적 뒷받침해야

지난 2010년 11월 사전예약을 받은 경기도 하남 감일 보금자리주택단지는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아파트 공사판이다. 사실상 서울 강남권역임에도 최초 예약자의 30%가량이 기다리다 지쳐 계약을 포기했다. /하남=권구찬기자




지난 11일 경기도 하남시 감일 공공주택지구.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 서하남 인터체인지(IC)를 빠져나오자 너른 들판에 아파트 건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린벨트를 갈아엎은 이곳은 올림픽공원과 자동차로 10분 거리로 이명박(MB) 정부 시절인 2010년 ‘반값아파트’를 표방한 3차 보금자리주택단지로 지정됐다. 개발사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면 강남 세곡, 서초 내곡지구처럼 아파트가 완공돼 반듯한 신시가지의 면모를 보였을 텐데 아직도 공사판이다. LH공사에 따르면 2021년 말쯤 돼야 입주를 완료해 제 모습을 갖출 것이라고 한다. 최초 사전예약 11년 만이다. 인근 감북지구와 통합개발을 추진하다 무산된데다 보상 지연과 문화재 발굴 등으로 택지개발 초기부터 큰 차질을 빚은 탓이다.

감일지구 외곽의 부동산중개업소에 만난 이모씨는 기자를 보자마자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2010년 11월 감일지구 사전예약에서 B3블록(578가구) 보금자리주택에 당첨됐다. 하지만 2013년으로 예정된 본청약이 계속 미뤄지는 바람에 기다리다 지쳐 2016년에 다른 아파트를 장만하면서 입주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씨는 “사전예약 공고문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지만 피해보상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었다”며 “이게 ‘사기분양’과 뭐가 다르냐”고 목청을 높였다.



이씨가 포기한 B3블록의 실제 분양 시점은 2018년 12월. 이곳 입주가 2021년 말인 점을 고려하면 최초 예약 당첨자로서는 무려 11년 동안 ‘전세 난민’으로 전전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단지뿐이 아니다. 같은 시기에 사전예약을 받은 7개 블록 3,932가구가 본청약과 입주에서 줄줄이 밀려났다. 심지어 10년 임대주택인 B1블록 (167가구)의 본청약은 지난해 10월 실시됐다. 장기 전세 난민을 각오하고 버틴 청약자에게만 ‘로또’의 행운을 가져다주는 제도가 공정한가 하는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남 감일지구는 MB 특유의 불도저식 주택공급 속도전에 나선 사전예약제의 처참한 실패와 정부발 내 집 마련 희망고문에 경종을 울리는 현장이다.

정부가 지난 8월4일 ‘수도권 주택공급 확대방안’ 발표에서 사전청약제 물량을 6만가구로 확대했다. 홍남기(가운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김현미(오른쪽) 국토교통부 장관, 서정협 서울시장 권한대행이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로 걸어가고 있다. /서울경제DB


정책 실패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정부가 사전청약제를 11년 만에 부활시켰다. 명칭(MB 때는 사전예약제)만 약간 다를 뿐 취지나 내용은 판박이다. 공급물량은 내년 하반기 3만가구와 내후년 3만가구 등 총 6만가구다. 2009~2010년 세 차례에 걸쳐 실시한 보금자리 사전예약 물량 3만여가구의 2배 수준이다. 현 정부의 사전청약제는 처음에는 ‘소박하게’ 출발했다. 정부는 5월 수도권 주택공급 확대방안에서 처음으로 사전청약 방침을 예고했다. 대상은 9,000가구에 그쳤다. 그러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물량을 확대하라는 주문에 7·10부동산대책에서는 3만가구로 늘렸다가 태릉 베드타운이 담긴 8·4대책에서 또다시 6만가구로 확대됐다. 주택공급이 부족하지 않다고 줄곧 외치다 물량 확대에 그치지 않고 공급 속도전까지 벌이는 모양새부터 우스꽝스럽다. 두성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부동산 민심을 달래기 위한 국면전환용 깜짝 카드라는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사전청약제로 인한 집값 안정 효과의 논란을 떠나 1차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깜깜이’ 청약 조장이다. 정부는 개략적인 위치와 평형, 가구 수, 추정 분양가격을 사전에 공개하는 등 나름 정보를 제공한다지만 기본적으로 불완전 정보다. 소비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하자 방지를 위해 공공물량부터 선도적으로 후분양하겠다던 정부가 국민을 ‘묻지 마’ 청약으로 내모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한 대형 건설사 마케팅 담당 임원은 “민간사업자가 수요 파악을 위해 사전예약을 받는다면 주택공급질서 교란사범으로 쇠고랑을 찰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부의 조기공급 방침에 서울시는 난감한 입장이다. 서울시 산하 SH공사는 오세훈 서울시장 때부터 소비자 보호 측면에서 공정률 60% 선에서 후분양해왔지만 어쩔 수 없이 후분양 원칙을 포기해야 할 처지다. 정부는 사전청약과 본청약 사이의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일반적인 선분양 방식에 따라 착공 후 곧바로 공급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0년 11월 LH공사가 서울 송파구 LH홍보관에서 하남 감일, 인천 구월, 서울 항동 등 3차 보금자리주택 사전예약 신청을 받는 모습./연합뉴스


사업추진 일정 지연 가능성은 현실적인 문제다. 과거 사전예약제가 남긴 상처는 깊다. 2009년 11월 첫 사전예약을 받은 시범지구 4곳(강남 세곡, 서초 우면, 고양 원흥, 하남 미사)은 그런대로 일정을 맞췄으나 이듬해 2차 지구부터 심각한 사업 차질을 빚었다. 서울 항동과 하남 감일, 구리 갈매, 시흥 은계, 남양주 진건 등 대부분의 사업지에서 보상지연 등으로 본청약이 기약 없이 미뤄졌다. 1~2년 지연은 예사였고 3~4년 늦춰지는 사업지도 속출했다. ‘1년여 뒤 본청약’ 약속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졌다. 2009~2010년 사전예약제 (LH 공급분) 당첨자 1만3,398명 가운데 실제 계약한 사람이 5,512명(41%)에 그친 연유는 여기에 있다. 본청약 지연으로 입주가 늦어지는데도 피해보상은 전혀 없었다. 입주 지연에 대한 손해배상인 지체상금은 입주자모집공고일, 다시 말해 본청약 이후 계약날짜가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MB 정부는 2011년부터 사전예약제를 전면 폐지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기 기간이 길어지면 전세 난민이 양산된다는 점이다. 서진형 대한부동산학회장은 “MB 정부 때 전셋값이 급등한 배경에는 무주택 요건을 맞추기 위한 기나긴 대기 기간이 있었다”며 “사전청약제는 가뜩이나 임대차 3법으로 불안한 전세 시장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라고 말했다.

국토교통부는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설명한다. 과거에는 보금자리지구 지정 이후 1년도 채 안 돼 사전분양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개발계획을 확정하고 토지 보상도 어느 정도 진척된 상태에서 문제가 없을 만할 곳을 추려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당장 토지 소유자들부터 집단 반발하고 있다. 공공주택지구의 토지 소유자와 주민 연합체인 공공주택지구전국연대대책협의회가 11일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사전청약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여 토지보상의 험로를 예고했다. 더구나 내년부터는 사실상 대선 국면에 돌입해 정권의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커지는 상황을 맞는다. 지방자치단체가 개발에 반발하는 태릉과 용산·과천·마포 등 관심 사업지는 사전분양 일정조차 그때 가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부 과천청사 유휴부지에 대한 정부의 주택공급 정책에 반대하는 경기도 과천시가 지난 8월 항의 표시로 유휴부지에 천막을 치고 임시 시장실을 운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야당 일부에서는 사전청약제가 ‘선거용’이라는 의구심을 감추지 않는다. 사전청약 시기는 공교롭게도 2022년 차기 대선 국면과 맞물린다. 부동산 전문가인 김현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은 “사전청약제는 과거에 문제가 많아 중도 폐기된 실패작인데 왜 재탕하려는지 의문”이라며 “현 정부는 애드벌룬을 띄워 생색을 내겠지만 뒷감당은 오롯이 차기 정부 몫”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MB 정부 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본청약과 입주 예정일을 제대로 준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주택산업연구원장을 지낸 권주안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패닉바잉’을 줄이겠다는 욕심에 무리수를 두면 희망고문이 될 수 있다”며 “본청약이 지연되면 소비자로서는 큰 낭패를 보기 때문에 이를 차단할 제도적 장치를 사전에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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