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대기업 주도 벤처캐피털(CVC) 활성화 법을 통과시키자 신사업 투자에 관심이 높은 대기업들이 물밑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꼬만 트이면 대기업 CVC발 투자가 봇물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감도 높다. 하지만 첫 단추를 끼우는 데 대기업들은 주저하고 있다. 대기업 1호 CVC의 영예(?)가 자칫 재벌 특혜라는 ‘주홍글씨’만을 달 수 있다는 우려가 여전히 팽배한 것이다.
11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주요 대기업 가운데 SK·LG·한화·GS 등은 CVC 법 통과 이전인 지난해 하반기부터 관련 검토에 들어갔다. SK그룹과 LG그룹은 주요 벤처투자가로부터 자문을 구하고 있고 GS홈쇼핑 벤처투자팀을 통해 3,500억원 가량 투자해온 GS그룹은 CVC 도입을 논의 중에 있다. 일부 기업은 500억 원 안팎 자본 규모로 CVC를 설립하고 관련 대표를 외부에서 선임하는 단계까지 진전했다.
바이오 벤처로 출발한 셀트리온은 서정진 회장이 직접 CVC 설립 구상을 밝힐 정도로 적극적이다. 그는 “CVC법이 통과되면 5,000억 원 규모의 벤처 펀드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셀트리온 역시 산업은행 등과 협약해 최근 3년간 3,700억 원 규모의 벤처 펀드를 운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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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그룹은 대부분 개정안 법 통과 전부터 지주회사 바깥 계열사나 해외 벤처 위주로 투자 조직을 운영해왔지만 법 개정으로 지주회사에 지분 100% 완전 자회사 형태로 투자 자회사를 거느릴 수 있게 됐다. 분산된 투자 역량이 하나로 집결되고 그룹 전체 사업 비전에 맞는 벤처기업을 전략적으로 투자하거나 인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이 법은 재벌 총수의 사익 편취에 해당할 수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만큼 대기업들도 여론을 극도로 의식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법안에는 반대론자의 의견을 담아 총수 일가 직접 투자 금지·총수 일가 지배 회사나 지주회사 밖 계열사 매각 금지 등의 조항이 붙었다. 특히 이 같은 조항을 어기면 3년 이하 징역이나 2억 원 이하 벌금을 부과할 수 있게 했다.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에서 CVC를 만들려는 의지는 있지만 1호가 되는 것은 피하자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국내 벤처 업계에 1조 원 이상 기업 가치를 인정받는 유니콘 기업이 등장하고 있지만 현재 통과한 CVC법은 부채비율 200% 준수·외부 투자 40% 이하·해외 투자 20% 이상 금지 등을 규정해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기는 쉽지 않다.
대기업의 벤처 투자 자체가 쉽지 않다는 회의론도 적지 않다. 스타트 업계의 한 관계자는 “SK나 현대차 등 주요 대기업이 투자를 검토했다 보류한 스타트업이 1년에 1,000개가 넘는다”면서 “대기업의 사업 방향과 맞고 관료적인 대기업 식 조직 문화를 스타트업에 강요하지 않아야 윈윈(win-win)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세원기자 wh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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