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정권을 초월한 에너지 위기 대응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일관되게 추진돼야 할 국가 에너지 정책이 정치 논리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탈원전 기조를 이어가는 가운데 석탄 발전을 급격히 줄이는 탄소 중립까지 단행할 경우 전력 계통의 안정성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력 계통의 불안정성은 고부가가치 정밀 제조업에 기반한 한국 경제에 위기로 작용할 수 있다.
23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산업부 에너지실과 KAIST는 공동 집필한 ‘탄력성장’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들은 우리 에너지 시스템의 위기 요인이 ‘정치권의 외풍’이라고 지목하며 에너지 안보의 위기 대응 체제는 ‘정권을 초월’해 일관되게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필에 참여한 한 인사는 “탈원전·친원전 프레임에 갇힐 게 아니라 에너지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가져가는 객관적인 기준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산업부와 KAIST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의 위기가 거대화·복합화·상시화되는 ‘블랙 타이드(Black Tide)’ 시대가 닥칠 것으로 진단하며 에너지 안보를 위협하는 위기 수준을 측정할 계량적 지표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재생에너지의 급속한 확대로 전력 계통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위기)면 어느 수준을 위험하다고 판단할지 기준(계량적 지표)을 만들어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에너지 정책을 설계해온 산업부가 공개적으로 에너지 위기 대응 체계를 제언한 것은 이례적이다. 일각에서는 탈원전 정책에 수난을 겪고 있는 산업부가 에너지 정책 담당 부처로서 결기를 보였다는 평가도 내놓고 있다. 산업부와 KAIST는 새로운 에너지 대응 체계를 구축할 법적 기반을 만들고 실무를 수행할 총리실 산하 국가에너지위기평가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제언했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탄소 감축 정책에 대한 우려도 제기했다. 국가 과제로 추진되는 탄소 감축 자체는 에너지 산업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원전 감축 정책과 동시에 추진되고 있어 자칫 전력 계통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국가 에너지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 싱크탱크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제언은 정치 외풍에 국가 에너지 대계(大計)가 뒤틀리는 일이 빈번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다. ‘광물자원 전쟁’에 대비해 착실히 자원 확보에 나선 세계 주요국과 달리 지난 정권에서는 자원 개발 ‘광풍’이 불었다가 현재는 ‘적폐’로 몰리는 상황에서 탈원전과 탄소 중립 정책을 밀어붙이며 나타나고 있는 각종 부작용에 대한 문제의식이 내포돼 있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에너지 시스템의 변화를 맞아 일관된 대응 체계 없이는 전에 없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이번 민관 제언에 녹아 있다. 산업부와 KAIST는 국가 에너지 정책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분명한 원칙을 정하고 이 원칙에 따라 국가 에너지 시스템을 다시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너지 안보 위협하는 변화들
에너지 분야에 나타날 다양한 변화 중 하나는 재생에너지 확대다. 지구온난화와 폭우 등 이상기후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탄소 감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산업부와 KAIST는 에너지 수입 의존도를 원천적으로 낮추는 동시에 미세 먼지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늘리는 게 불가피하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변동성이 문제다. 날씨에 따라 출력이 들쭉날쭉한 재생에너지의 비중이 증가할수록 공급 분야에서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민관은 풍력발전 비중을 대폭 확대한 제주도의 발전 상황을 예로 들었다. 발전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제주 풍력발전단지가 넘치는 출력을 제어하기 위해 셧다운 조치를 내린 횟수는 총 44회로 평균 4일에 한 번꼴로 발전기를 멈췄다.
세계 에너지 생산의 중심축이 중동 지역에서 미국과 러시아 등으로 다변화하면서 석유 등 자원의 수급 형태도 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산업구조 변화로 리튬이나 니켈·희토류 등 신산업 원료 중심으로 광물자원을 확보할 필요성도 커졌다고 봤다.
변화 대응하려면 정치 입김 배제 돼야
이례적으로 산업부는 KAIST와 함께 이 같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확고한 체제를 확립하려면 먼저 정치권의 입김을 배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가 에너지 안보와 직결된 발전원 조정 문제나 자원 개발 등 에너지 정책 전반이 그간 정치권의 입김에 지나치게 흔들렸다는 점을 인정하고 시스템을 다시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탄력성장’ 집필에 참여한 한 인사는 “한 때는 자원 개발에 ‘올인’하더니 정권이 바뀌자 유명무실해진 것이 단적인 사례”라며 “에너지 안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정권에 구애받지 않고 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인사는 “발전원을 조정하는 문제를 두고 정치권은 ‘탈원전’ ‘친원전’ 프레임에 매몰돼 있고, 정권이 바뀌면 현재의 에너지 정책이 180도 바뀔지 모른다”며 “에너지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기준 설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관 전문가들은 에너지 시스템을 위협하는 각각의 위기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계량적 지표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정권을 초월한 ‘에너지 전략 매뉴얼’을 마련해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탈탄소에 탈원전...전력 안정성 지킬 수 있나
현재 추진되고 있는 에너지 전환 정책도 질서 있는 이행과 정책 비용을 낮추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국가 과제로 추진되는 탄소 감축 자체는 에너지 산업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탈원전 정책과 동시에 추진되고 있어 자칫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탄소 중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석탄 발전을 과감하게 줄여야 하지만 이 경우 전력 계통 안정성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력 계통의 불안정성은 고부가가치 정밀 제조업에 기반한 한국 경제에 위기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관은 “기후변화가 전력 수요의 변동성을 키워 수요 예측이 한층 더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전원을 어떻게 구성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관은 또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강도가 높을수록 에너지 공급 원가가 급격히 상승할 수 있으며, 석탄이나 원전 등 감축 대상 발전원에 투자한 사업자들의 매몰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민관은 에너지 전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산업부와 환경부 간 논의가 보다 활발하게 이뤄져야 하며 부처 간 이견이 있을 경우 청와대의 보다 적극적인 조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외에 민관은 한국전력과 가스공사 등이 독점하고 있는 공급 구조도 손봐야 한다고 밝혔다. 재생에너지와 분산 에너지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더는 중앙집권적 공급 시스템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종=김우보 기자 ub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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