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행정부에 이어 조 바이든 정부도 반도체 핵심 장비를 중국에 팔지 말라며 네덜란드를 압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에서는 중국의 반도체 기업 인수합병(M&A)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중국 반도체 굴기의 숨통을 조이려는 서구권의 압박 강도가 갈수록 세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17일(현지 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네덜란드 정부는 미국의 압력으로 자국 기업 ASML의 극자외선(EUV) 첨단 노광 장비의 중국 수출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ASML 제품은 실리콘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7㎚(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의 미세 회로를 새길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반도체 생산 장비다. 대당 가격이 1억 5,000만 달러(약 1,700억 원)에 달하지만 삼성전자와 대만 TSMC, 인텔·마이크론 등 반도체 업체들의 주문이 밀려 있다. 생산 규모가 제한적인 데다 이 장비 없이는 최첨단 칩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ASML은 올해 42대, 내년에 55대를 생산할 예정이다. WSJ는 “미국 관리들이 네덜란드 정부에 국가 안보 우려를 이유로 대중 수출 제한을 요구했다”고 전했다.
미국의 반도체 옥죄기로 중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지난해 중국은 ASML 매출의 17%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는 구세대 기계로 미국이 수출을 막고 있는 신형 장비가 없다면 중국 기업들이 미국과 한국·대만 업체의 반도체 기술을 따라잡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중국이 ASML의 기술력을 추월하는 데 10년이 걸릴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정부의 입장은 완고하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네덜란드에 연락해 ASML의 장비 수출 문제를 거론했다. 트럼프 행정부 때인 지난 2019년에는 찰스 쿠퍼먼 국가안보보좌관이 “좋은 동맹은 이런 장비를 중국에 팔지 않는다”며 대중 수출 금지를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ASML의 부품 가운데 상당수가 미국산이라며 수출 제한 권한이 있음을 강조했다. 네덜란드가 협조하지 않을 경우 미국 부품의 네덜란드 수출을 막을 수도 있다는 엄포다. WSJ는 “중국 정부 관계자들이 네덜란드에 ASML의 장비 수출 허가를 내주지 않는 이유를 정기적으로 물어보면서 판매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양국 무역 관계가 훼손될 수 있다고 압박하고 있다”며 “바이든 행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책을 이어가며 ASML 장비의 중국 판매를 막으려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영국에서도 중국의 반도체 패권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 경제 방송 CNBC에 따르면 보수당 대표를 지낸 이언 덩컨 스미스 하원의원은 최근 영국 의회에서 “중국은 반도체 기술을 자국이 세계를 지배해야 할 핵심 분야로 보고 있다”며 “중국은 기술을 훔치고 다른 나라의 기업들을 사들이느라 바쁘다”고 주장했다.
앞서 중국 자본이 소유한 네덜란드 반도체 회사 넥스페리아가 5일 영국 최대 반도체 회사 뉴포트웨어퍼팹(NWF)을 인수했고 영국 이매지네이션테크놀로지와 프랑스 랑셍, 네덜란드 앰플레온 등이 최근 몇 년간 중국 국영회사에 넘어갔다.
이렇다 보니 영국 정부도 개입에 나섰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14일 “넥스페리아의 NWF 인수는 국가 안보 심사 대상”이라고 밝혔다. 판단 결과에 따라서는 M&A가 무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덩컨 스미스 의원은 “반도체에 대한 중국의 생각을 그동안 (영국) 정부가 제대로 살펴봤는지 궁금하다”고 지적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국 경제와 월가의 뉴스를 쉽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