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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칼럼] 좀비가 된 '가정의 가치'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

전통적 가족구조 쇠퇴=사회 붕괴

보수사상가 주장과 달리 혼란없어

강력한 출산장려정책 펴기보다는

양질의 육아·보육 환경 조성해야

폴 크루그먼




지난 1992년 미국 정가는 ‘가정의 가치’라는 화두로 시끄러웠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경기 부진과 소득 불평등 확대로 지지율이 급감하면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댄 퀘일 부통령이 뜬금없이 TV 시트콤의 극중 인물인 머피 브라운을 비난하고 나섰다. 당시 캔디스 버건이 연기한 브라운은 출산을 결심한 미혼 TV앵커 역할로 한창 화제 몰이를 하고 있었다. 유권자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기 위해 퀘일이 미혼모라는 색다른 이슈를 들고나온 것이다.

필자는 공화당의 오하이오주 연방 상원의원 후보이자 ‘힐빌리의 노래’의 저자인 J D 밴스의 최근 발언에 관한 기사를 읽으며 머피 브라운 사건을 떠올렸다. 밴스는 유력한 민주당 인사들을 자녀를 낳지 않은 ‘무자식 좌파’로 싸잡아 매도했다. 그는 이어 출산 장려금을 지급하는 헝가리 정부를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며 정부 수반인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와 그의 정책을 한껏 치켜세웠다. “우리는 왜 그들처럼 하지 못하느냐”는 힐난도 곁들여졌다.

밴스가 강력한 출산 장려 정책을 시행하는 유럽의 여러 나라 중 유독 헝가리를 지목해 칭찬한 것은 흥미롭다. 예컨대 부양 자녀를 둔 가정에 대대적인 금전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프랑스는 출산율이 가장 높은 선진국 중 하나다. 그런데 밴스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백인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독재 정부를 골라 칭찬한 것일까.

퀘일의 시트콤 공격은 전통적인 가치의 하락, 특히 전통적 가족 구조의 약화가 광범위한 사회적 붕괴를 예고한다는 거트루드 힘멜파브와 같은 보수적 사상가들의 주장이 수그러들지 않는 가운데 나왔다. 빅토리아 시대 덕목의 상실이 범죄와 혼란으로 가득 찬 미래로 연결될 것이라는 주장은 여전히 힘을 잃지 않는 분위기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사회는 무너지지 않았다. 미혼모 자녀의 비중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정의 가치에 관한 과다한 주장이 정점을 찍은 시기는 강력 범죄가 큰 폭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특히 대도시들은 이전에 비해 훨씬 안전해졌다. 2010년대 뉴욕의 살인 사건 발생률은 1950년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체적인 범죄의 경우와는 달리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간 살인 사건은 급증했다. 전체적으로 범죄가 크게 줄어든 정확한 이유를 모르듯 유독 살인이 급증한 까닭 역시 알 수 없다. 팬데믹 기간 사회의 다른 측면에서도 종잡을 수 없는 변화가 발생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주행거리는 크게 줄었지만 교통사고 사망 건수는 오히려 큰 폭으로 증가했다. 짐작컨대 강요된 고립이 사회에 끼친 영향 탓이겠지만 가정의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전통적인 가정의 쇠퇴가 미국보다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 현저하게 두드러졌다는 사실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인센티브를 활용해 출산율을 높이는 데 성공했으나 대부분의 신생아가 미혼모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미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역시 사회적 혼란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의 살인 사건 발생률은 미국의 7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친다.

물론 미국 사회가 모두 원만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마약과 과음·자살 등은 우려할 수준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통적인 가치의 붕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힘들다.

미국 전역에서 신앙심이 가장 강력한 10개 주 중 7개 주의 마약·과음·자살 등으로 인한 사망률은 전국 평균치를 웃돈다. 경제의 중심축이 고학력 대도시권으로 이동하면서 기회가 사라진 지방과 소도시에서 이러한 현상이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의미다.

만약 어떤 정치인이 다른 사람의 개인적 선택을 문제 삼아 사사건건 공격을 가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미국인의 삶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 정책을 제안할 능력이 아예 없거나 의도적으로 꺼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신호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들은 수두룩하다. 그중에서도 부양 자녀를 둔 가정에 재정 지원, 양질의 의료보험과 보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가 꼭 해야 할 일들의 목록 맨 위쪽에 위치한다. 출산을 장려하자는 게 아니다. 그것은 개인이 결정해야 할 문제다. 그보다 아이들이 더욱 건강하고 생산적인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활 여건을 개선해야 한다.

엘리트 사회 구성원들의 개인적 결정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이 한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그가 지적·도덕적 파산 상태에 있음을 가리키는 신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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