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예산안 국회 제출 일정이 코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당정 간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쌀을 곳간에 쌓아두기만 하면 썩어서 못 쓰게 된다는 여당과 재정 건전성의 파수꾼인 기획재정부가 맞붙은 양상입니다.
현재로서는 여당이 우세해 보입니다. 당정이 갈등을 보이는 문제에 대해 대체로 침묵해 온 문재인 대통령도 내년도 예산안에 대해서만큼은 이미 “정부 예산을 확장적으로 편성하도록 재정 당국이 부처들과 함께 논의하라”고 일종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도 “재정의 마중물 역할을 위해 확장적으로 예산을 편성하겠다”고 최근 각오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기재부로서도 이번 예산안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흥청망청 예산안에 제동을 걸지 못하면 기재부의 존재 자체가 부정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정권 말에는 가능한 긴축 재정안을 마련해 차기 정권에 부담을 덜어주는 게 오랜 미덕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기재부 내부에서는 내년도 본예산 총액을 600조 원 아래에서 막아야 한다는 기류가 강합니다. 이는 올해 본예산(558조 원)보다 약 7.6% 가량 늘어난 금액입니다. 사실 이 정도 지출 증가율만 해도 이명박 정부 평균 증가율(6.59%)이나 박근혜 정부(4.28%)를 상회하는 수치이지만 추경 예산을 제외하고도 거의 매년 8~9%씩 지출을 늘려왔던 문재인 정부 씀씀이와 비교하면 내년 대선을 앞둔 여당으로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는 수치이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내년 예산이 599조 원이 되나 601조 원이 되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사실 지금 기재부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내년부터 찾아올 수 있는 국가 신용등급 강등 가능성입니다. 아예 내년 신용등급 강등을 기정 사실로 놓고 지금부터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관료도 있습니다. 만약 신용등급이 지금보다 떨어지면 국제 자금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비용이 올라 나라 경제 전반에 상당한 부담을 안기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 신용등급에 깐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평가기관인 피치는 지난달 말 “한국은 고령화에 따른 지출 압력이 강한 국가이며 이런 상태에서 국가채무가 늘어나면 재정 운용상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600조 원이라는 숫자가 재정 건전성을 지켜나가겠다는 한국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일종의 마지노선이 될 수도 있는 셈입니다.
다만 이미 두 차례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으로 올해 총지출액이 605조 6,000억 원에 달하는 점은 정부로서는 부담입니다. 지금까지 예산을 짤 때 전년도 본예산과 추경을 합한 총지출보다 더 많이 편성해온 관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여야가 선거용으로 지역 예산을 크게 요구할 텐데 반드시 필요한 분야만 넣고 규모를 조금 줄여놓아 여지를 줘야 한다”며 “그래야 다음 정권에 대한 예의이고, 필요시 추경이라도 편성할 수 있는 재정 여력을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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