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위기가 전 세계의 유동성을 급격히 불리면서 박스권을 전전하던 코스피가 올해 초 3,000선을 돌파했다. 13년 5개월 만에 코스피의 마디가 바뀐 것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뤘지만 동시에 자본시장 참여자들의 고민도 커졌다. 개인투자자들은 커진 영향력을 바탕으로 공매도, 양도세와 관련한 자본시장의 룰 수정을 정치권에 요구하고 있다. 금융투자 업계는 업그레이드된 지수에 걸맞은 일관성 있는 과세 체계 재정비, 기관투자가 활성화를 위한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국내 증시의 변동성이 커지고 그만큼 참여자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요즘 국내 자본시장의 싱크탱크인 자본시장연구원을 새로 이끌게 된 신진영 원장을 만났다. 9월 30일 취임한 신 원장은 1997년 자본연 설립 이후 공모 방식으로 선발된 첫 원장이다. 자본연 후보추천위원회는 절차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공모 방식으로 신임 원장을 뽑기로 했고 그가 3명의 후보를 제치고 최종 선발됐다. 신 원장은 연세대 경영대 교수로 재직 중인 학자이자 한국증권학회 회장,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원장, 증권사 사외이사, 한국거래소 코스닥공시위원회 위원장 등 현장 업무까지 섭렵한 증권 업계 전문가다. 향후 3년간 자본연을 이끌 신 원장에게 한국 증시가 당면한 과제와 나아갈 길을 물었다. /대담=한영일 증권부장 hanul@sedaily.com
“현재 한국 자본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이슈는 ‘모험자본 공급 확대’와 ‘연금 체계 보완’입니다. 점점 떨어지는 한국의 성장률을 끌어올리려면 생산성 개선이 필요합니다. 또 제대로 된 노후 준비 없이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고령층 빈곤율이 가장 높습니다. 그런데 두 문제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노후자금이 모험자본에 흘러 들어간다면 ‘경제 성장’과 ‘노후 안전판 확대’라는 선순환 흐름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3년의 임기 동안 이와 관련해 금융시장의 대응 방법을 고민해보겠습니다.”
신 원장은 한 단계 도약한 자본시장이 단순히 돈을 버는 기회의 장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면서 경제 전반에 기여해 동반 상승 작용을 일으킬 길을 모색하고 있다. 실제로 코스피가 두 배 가까이 뛰어오르면서 증권가는 폭죽을 터뜨렸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완만해지는 경제 성장률을 보며 고착돼가는 저성장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이달 한국경제연구원은 2010년 8.3% 수준이었던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코로나19 확산의 영향 등으로 지난해 2.2%로 하락했고 향후 10년 내 0%대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신 원장은 연금시장과 모험자본을 연계해 자본시장의 온기를 경제 전체로 확산시킬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고령화 사회 진입으로 덩치를 키우는 연금자금이 혁신자본을 필요로 하는 기업에 자금을 대주며 경제의 활력을 높일 수 있고 이를 통해 턱없이 낮은 연금 수익률도 제고하는 이점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OECD 회원국 중 가장 빠르지만 실질 노후소득 대체율은 15%로 OECD 평균(55%)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부실한 노후 대비는 성장의 발목을 잡는 핵심 요인으로 국민 개개인의 노후 안전망 확충이 시급한 실정이다. 신 원장은 “모험자본은 위험도가 상대적으로 높지만 그에 따른 결과가 단순한 수익뿐 아니라 경제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투자를 말한다"며 “(한국 사회는 원리금 보장 상품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짙지만) 1%대의 저금리로 노후의 경제생활을 담보할 수 없기에 국민연금처럼 대체투자 비중을 늘려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 원장은 “노후자산 관련 제도 중 정비될 것이 많다”면서 투자자와 시장이 자본연에 바라는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그는 연금시장에서 가장 먼저 개선돼야 할 과제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도입을 꼽았다. 디폴트옵션은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 또는 개인형퇴직연금(IRP) 가입자가 운용 지시를 하지 않아도 금융사가 사전에 결정된 방법으로 투자 상품을 자동 선정해 운용하는 제도다. 한국 퇴직연금의 연간 성과는 1~2%대지만 디폴트옵션을 도입해 기관에 운용지시권을 맡긴 미국과 호주는 연평균 7%의 수익률을 내고 있다.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대 국회 때부터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증권과 은행·보험 업권 간 대립, 여야 간 공방으로 도입이 지연되고 있다.
신 원장은 “디폴트옵션 도입 효과는 선진국에서 이미 입증됐으며 장기 투자가 가능한 타깃데이트펀드(TDF) 활용이 바람직하다”며 “3중의 연금 구조(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가 확보돼야 하지만 한국에는 퇴직연금에 가입하지 않은 근로자가 여전히 많은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부실한 노후 준비는 결국 정부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궁극적으로 젊은 세대의 부가 노년 세대로 이전되면서 ‘세대 갈등’을 야기할 것”이라며 “현재의 퇴직연금 제도를 방치하면 이 같은 문제는 더욱 악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 자본시장의 몸집을 빠르게 키워준 개인투자자의 공을 높이 사면서도 직접투자 행태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지난해 3월부터 현재까지 개인투자자는 국내 양대 증시에서 총 137조 원(코스피 112조 원, 코스닥 25조 원)을 순매수하며 직접투자가 일반적인 투자 형태로 자리 잡았다. 다만 패기 있게 시장을 들어 올렸던 개인의 투자 성공담을 찾기가 쉽지 않고 올 하반기 지수가 횡보 국면에 접어들면서 지속적인 수익 창출에도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실제로 올해 자본연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로 호황을 보였던 지난해 한국 주식시장에서 신규 개인투자자 3명 중 2명이 손실을 본 것으로 나타났다. 젊은 층 중심의 빈도 높은 거래, 대박을 노리는 복권형 주식 선호, 테마주 추종 등이 투자 실패 이유로 지목됐다.
신 원장은 “개인들의 매매를 보면 (단기 고수익 추종, 과도한 레버리지 등) 우려했던 투자 행태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정보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직접 투자하는 것보다는 펀드 등을 통한 간접투자가 바람직하다"면서 “고수익을 과도하게 쫓는 한국의 전반적인 투자 문화가 바뀔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생활비, 내 집 마련 등을 목적으로 주식에 뛰어드는 일부 투자자가 있는데 투자 동기에서부터 초점이 어긋났다"며 “생애 주기의 현금 흐름을 따져 노후 안정을 목적으로 투자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개인들의 공격적인 투자 행태에 ‘훈수’를 둬 해결하는 것은 요원하며 세제 개편이 장기 및 분산 투자를 유도하는 가장 좋은 대안이 될 것이라고 짚었다. 신 원장은 “이번 정부에서 세제를 정비하긴 했지만 아직 개선해야 할 사항이 여럿 남아 있다”며 “투자 자산 전체에 대해 손익을 통산하고 이익 실현 시 과세한다면 자연스럽게 장기 및 분산 투자 풍토가 한국에도 뿌리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장기 투자 유도와 국민 재산 형성을 취지로 절세 혜택을 내세운 중개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는 2월 출시 이후 9월 말까지 166만 명이 가입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오는 2023년부터 연 5,000만 원이 넘는 금융투자 소득에 과세되지만 ISA를 이용하면 비과세되며 계좌 내에서 발생한 소득에 대해서는 손익을 통산해 세금을 매긴다. 이 같은 혜택의 조건은 3년 의무 보유이며 이 기간에 자금을 뺄 수 없다. 그는 “세제 보완 이후 개인이 ISA에 굉장히 큰 관심을 보였는데 바람직한 흐름”이라며 “단순한 투자 활성화가 아닌 금융 자산 투자로 노후를 대비할 수 있는 통합적인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올해 투자 시장의 화두 중 하나였던 ‘가상자산’도 그가 자본연을 이끌 3년 동안 힘을 실을 연구 주제다. 그는 지난달 상장한 미국의 첫 비트코인 선물 ETF ‘프로셰어스 비트코인 스트래지스트(티커 BITO)’를 제도권 편입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이벤트로 평가하면서 코인 투자를 더 이상 자본시장 주변부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현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게 됐다고 진단했다. 특히 한국은 해외 어느 국가보다 코인 투자 열기가 거센 편이다. 국내 4대 암호화폐 플랫폼의 일일 거래 규모는 약 10조 원 수준으로 코스피와 맞먹는다.
그는 “해외 언론을 보면 기관투자가들이 암호화폐를 포트폴리오의 일부로 편입할 것을 고민한다”며 “가상자산 투자 현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뜯어보며 정책 대안 도출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연구를 수행하겠다”고 계획을 밝혔다. 이어 “한국 자본시장의 제일 큰 장점은 산업뿐 아니라 국민 경제, 투자자에게 기여할 수 있는 성장의 여지가 크다는 점”이라며 “임기 동안 한국 자본시장을 위해 무엇을 해볼 수 있을지는 여전히 고민 사항이지만 임기를 마칠 때는 그 성과를 말할 수 있게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He is… △1962년 서울 △1985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87년 서울대 경제학 석사 △1990년 카네기멜런대 재무학 석사 △1993년 카네기멜런대 박사 △1993년 홍콩과학기술대 조교수 △1999년 아주대 부교수 △2002년 연세대 경영대 교수 △2019년 2월 한국증권학회 회장 △2019년 6월 한국기업지배구조연구원 원장 △2021년 9월 자본시장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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