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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등재 신청 앞둔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 빠뜨려선 안 돼"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위연구회 위원

동북아역사 리포트 게재 글 통해 밝혀

日 사도광산 역사 에도시대로 한정해

1,500명 조선인 강제동원 등 제외돼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광산’이 일본 문화심의회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됐다. 사진은 사도 광산 유적 중 하나인 도유(道遊)갱 내부의 모습./연합뉴스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니가타(新潟)현 '사도(佐渡)광산'은 침략전쟁을 위한 탐욕의 땅이었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인이 동원했던 곳이라는 사실을 제외해서는 안 된다는 국내 학계의 지적이 나왔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은 지난 30일 동북아역사재단이 발간한 동북아역사 리포트에서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세계 시민이 공유해야 하는 완전한 역사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며 "완전한 역사는 16세기부터 정권을 위해 일본 민중을 동원했고, 일본의 침략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 민중을 동원했던 곳이라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일본은 사도광산을 202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선정하고 등재를 추진 중이다. 나가타현과 사도시는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관련 서류에서 사도광산의 역사를 1867년에 끝난 에도(江戶) 시대 이전으로 한정했다. 일본 니가타현 북서쪽 사도섬은 헤이만(平安)시대(794~1185) 말부터 사금을 채취해오던 곳으로 전근대 시기 채굴에 일본인을 투입했다면 아시아 침략을 위한 금채굴에는 조선인을 동원했다.

정 위원은 "사도광산이 1943년 6월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년 3월 기준으로 조선인 1,500명이 동원됐는데, 그 중 10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탈출했다"며 "조선인이 파업을 했다가 진압 당한 사례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한반도 침략과 영토확장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사용된 금은 78톤이고, 은은 2,300톤에 이른다"며 "에도(江戶)시대 사도광산 광부들의 수명은 2~3년 밖에 불과해 광산생활의 참혹함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리포트에는 조선인 사도광산 강제징용자였던 고(故) 임태호씨 사례도 인용됐다. 생전 임씨의 진술에 따르면 숙소에서 광산까지는 한 시간 반이나 걸렸고, 지하에서 죽음을 맞닥트리는 일을 해야 해서 하루하루가 공포 그 자체였다고 전하고 있다. 실제 사도광산 노동자 중 일부는 해방 이후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진폐증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정 위원은 "한국 정부가 인정한 사도광산 피해자는 148명으로 그 중 9명이 현지에서 사망했고, 73명이 후유증을 신고했다"며 "73명 중에는 1970년대 사망한 사람이 많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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