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시의 무게 중심이 빅테크 등 기술성장주에서 우량가치주로 이동하는 양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3분기 실적 발표가 막바지를 향해 가는 가운데 기대 이상의 실적을 과시한 정유·금융·음식료주 등 가치주에서는 52주 신고가가 속출했지만 대형 기술주들은 실적 부진과 업황 악화라는 이중고에 빠져 연일 신저가를 기록 중이다. 전문가들은 빅테크 주가가 지나치게 내리며 저가 매수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고물가·고금리 기조 아래에서 성장주의 반등은 생각보다 더 지연될 수 있다며 투자에 신중할 것을 조언하고 있다.
6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기업들의 3분기 어닝 시즌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뉴욕 증시에서 가치주와 성장주로 각각 분류되는 기업들은 실적뿐 아니라 주가에서도 선명하게 갈린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10월 이후 가치주가 주로 모여있는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12.8% 뛴 반면 성장주 위주인 나스닥지수는 -0.95% 하락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글로벌 에너지 위기의 최대 수혜주로 꼽히는 미 정유주가 대표적이다. 유가의 가파른 상승세에 힘입어 올 들어서만 50~80%씩 주가가 뛰었던 정유주는 유가 반락으로 잠시 주춤하는 듯 했지만 3분기 역대급 실적을 발표하며 다시 상승세를 탔다. 이들 기업은 벌어들인 막대한 이익을 바탕으로 배당금을 올리는 동시에 자사주 매입도 늘리겠다고 선언하며 주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실제 엑손모빌, 셰브론, 코노코필립스, 마라톤 페트롤리움 등의 정유주는 4일(현지시간)에도 장중 52주 신저가를 이어가는 등 고공행진 중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발 금리 상승의 수혜를 입은 금융주도 3분기 실적을 통해 시장의 불안을 떨친 가치주로 꼽힌다. 강도 높은 긴축에 글로발 금융시장이 충격을 받으며 금융주 역시 타격을 입으리리는 우려가 컸지만, 실적을 확인해보니 일부 투자은행(IB) 비중이 높은 곳을 제외하고는 금리 인상으로 인한 이익 증가세가 가팔랐다. 특히 개인 소비자를 주요 고객으로 하는 지방의 상업은행과 보험사, 카드사 등은 크게 꺾이지 않고 있는 개인 소비에 예대마진(대출금리-예금금리) 급증이라는 호재가 맞물리며 실적이 껑충 뛰었다.
가격 인상에도 흔들림없는 수요를 자랑하는 대형 음식료 기업들의 약진도 두드러졌다. 펩시코, 코카콜라, 맥도날드 등은 이번 실적 발표를 통해 비용 증가보다 이익 증가 폭이 더 컸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펩시코는 가격을 17% 올렸지만 판매량은 1% 감소했다. 한 번 올린 가격은 유지되기에 향후 인플레이션이 완화돼 비용이 감소할 경우 추가 마진까지 기대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는 분석이다.
가치주들이 미국 증시를 이끌어가는 동안 앞서 미 증시의 주도주로 꼽혔던 빅테크 기업들은 재앙 수준의 주가 하락을 경험했다. 월가의 실적 눈높이에 어긋난 알파벳, 아마존, 메타 등이 실적 발표 이후에만 11~30%씩 급락하는 등 두 자릿 수 하락세를 보였다. 월가 전망치를 뛰어넘은 호실적을 낸 애플도 실적 발표 전 155달러까지 치솟았던 주가가 현재는 138달러 수준까지 내려 앉았다.
전문가들은 금리 인상기를 맞아 주가 대비 이익 수준이 낮은 성장주들이 혹독한 시련의 계절을 맞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최재원 키움증권 연구원은 “가치 스타일의 종목은 3분기 실적이 시장 전망을 웃도는 경우 주가 상승 흐름이 강하게 나타났고 밑돌아도 주가가 비교적 적게 하락했다"며 "반면 성장 스타일의 종목은 실적 전망을 상회해도 수익률이 하락했고, 전망을 하회하는 경우는 평균적으로 9.4% 하락하는 등 ‘어닝 쇼크’ 패널티가 성장 스타일에 집중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연준의 고강도 통화정책 긴축 기조에 따라 성장 스타일을 중심으로 실적 눈높이 재조정이 주가에 보다 민감하게 반영되는 과정으로 해석된다”고 덧붙였다.
성장주의 주가 하락이 워낙 심해 개인 투자자들 사이에서 저가 매수세가 꿈틀대는 모습이지만 아직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경기 침체 우려로 기업들의 주당순이익(EPS) 전망치가 낮아지고 있는 가운데 애플, 아마존, 알파벳 등 빅테크 기업들이 실적 하향세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강현기 DB금융투자 연구원은 “최근 수익률이 높았던 종목들은 밸류에이션이 낮고 배당수익률이 높으며 매출 및 이익 증가율이 지속할 것으로 기대되는 기업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며 “지금껏 상당한 성장성을 보인 기업의 주가가 크게 내려가 저평가됐으므로 투자 매력이 배가되고 있다는 의견이 대두하고 있지만 당분간은 경제적 해자를 갖춘 가치주에 투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분석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