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법인파산 수가 전년 동기 대비 10% 가까이 급증한 것은 산업계에 여러모로 좋지 않은 신호다. 고물가·고환율·고금리 등 이른바 ‘3고(高) 사태’가 지속되면서 우리 경제의 가장 취약한 고리인 한계기업들부터 쓰러졌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경제는 심리다. 기업 규모를 떠나 기업 도산이 이어질 경우 ‘실업→가계 부실→금융 부실’의 경로를 타고 산업 현장 전반에 불안감을 고조시킬 수 있다. 실물경제가 위축될 때는 나쁜 작은 신호 하나가 시장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수 있다. 최근 회사채 시장을 대혼란에 빠뜨린 레고랜드 사태도 강원도가 2050억 원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에 대한 지급보증을 철회한 작은 사건에서 촉발됐다.
같은 맥락에서 법인파산 신청이 급증한 것은 방향과 질 모두 좋지 않다는 의미다. 먼저 지난해 감소세를 보였던 법인파산 신청이 1년 만에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법인파산 신청은 2020년(9월 말 누계 기준)에 815건까지 급증했다.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고 전년 동기 대비 18%나 늘었다. 그러다 지난해 674건으로 감소했다가 올해 738건으로 다시 증가했다. 지역별로 봐도 파산법원이 잘돼 있는 서울(314건), 수원(145건) 외에도 대전(56건), 부산(38건), 대구(34건), 인천(27건), 의정부(26건), 광주(22건), 청주(20건), 창원(19건), 전주(14건), 울산(12건) 등 전국적으로 법인파산 신청이 몰렸다.
문제는 4분기에도 ‘3고 사태’와 경기 침체가 맞물리면서 법인파산을 신청하는 기업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9월 말 누계 기준 법인파산 신청(738건)은 법원행정처가 전산으로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13년 이래 2020년(815건)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하지만 이런 추세대로라면 올해 연말 누계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인 2020년(1069건)에 근접하거나 경신할 것으로 예상된다.
법인파산 신청 증가는 질적인 면에서도 좋지 않다. 법원의 주도하에 채무 변제 계획을 세워 재기하는 기업회생이 감소한 자리를 대신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업회생 신청 건수는 법인파산 신청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2020년 처음으로 역전됐다. 법인회생은 2019년 732건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20년 677건, 2021년 524건, 2022년 454건으로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 법인파산 신청 대비 회생 신청 비율은 2017년 123%까지 치솟았다가 2020년 처음으로 100% 아래로 떨어졌다. 이어 2021년 77.7%, 2022년 61.5%로 매년 감소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 말께 50%대까지 떨어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빚을 갚아 재기하려는 회생 신청이 줄어드는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로 위기에 내몰린 한계기업들이 재기할 의지마저 꺾이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어서다. 한계기업들 사이에서 ‘빚을 갚기보다 파산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인식이 확산될 경우 기업들의 줄도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수 있다.
이미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막기 어려운 한계기업은 최근 5년 새 15% 급증한 상황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7년 3111개였던 한계기업 수는 2021년 3572개로 14.8% 증가했다. ‘좀비기업’으로 불리는 한계기업은 3년 연속 영업이익이 이자비용에도 못 미치는 기업을 말한다. 지난해 말 전체 기업(외부감사 수감 기업) 가운데 14.9%가 여기에 해당했다. 중소기업은 100곳당 16곳, 대기업은 12곳꼴로 각각 한계기업으로 분류됐다. 올해 말까지 금리 인상 기조가 이어지면서 기업의 이자 부담 증가로 한계기업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제위기는 가계와 기업 모두 항상 취약한 지점에서 촉발된다”며 “올해 말과 내년까지 금리 인상 기조와 경기 부진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한계에 몰린 기업들 가운데 파산을 선택하는 기업들이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업이 재기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사라지면서 채권자들이 법인회생에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히고 있다. 이 때문에 회생 과정에서 파산으로 전환하는 상황마저 일어나고 있다. 최근 변호사 사무실에 회생보다 파산 상담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점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안창현 법무법인 대율 대표변호사는 “벌어서 갚는 회생보다 파산을 많이 선택한다는 것은 기업이 이제는 버틸 수 없는 한계상황에 내몰렸다는 의미”라며 “법인파산이 회생보다 많은 역전 현상은 결국 기업 줄도산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위험신호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