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에 이어 마이크 펜스의 사저에서도 기밀문서가 발견됐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몇 가지 팩트부터 짚고 넘어가자. 2004년 현재 미국에는 총 75억 쪽 분량의 기밀문서가 존재한다. 2012년에는 3초마다 한 건씩 총 9500만 건의 기록물이 기밀문서로 지정됐다. 하지만 오늘날 얼마나 많은 정보가 기밀로 분류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반면 2019년 기준으로 전체 기밀 정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극비(top secret) 문건에 접근이 가능한 사람들의 수는 400만 명을 웃돈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스캔들은 전현직 대통령의 기밀문서 유출이라기보다 민주적인 정부의 위상을 뒤흔들 만큼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정보 관리 시스템이다.
1998년 당시 상원정보위원회 소속이었던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 민주당 의원은 ‘기밀: 미국의 경험’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상원정보위가 설치된 1976년 이후 줄곧 소속 위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 책에서 모이니핸 의원은 미국 정부 내부의 ‘비밀주의 문화’를 개탄했다. 그는 비밀주의가 외교정책에 악영향을 줄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믿었다. 모이니핸은 정부의 최대 실책 가운데 많은 부분은 정보 공유를 꺼리고 정보 분석에 외부의 비판을 차단한 데 따른 결과라고 주장했다.
정보 커뮤니티는 대체로 소련의 위협이라는 한 가지 문제를 평가하기 위해 창설됐다. 그러나 이들은 초반부터 큰 실수를 저질렀다. 1950년대 이들은 미사일 기술과 배치에서 소련이 미국을 크게 앞질렀다고 평가했다. 대단히 중요한 정보였지만 완전히 잘못된 주장이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무너져가던 1980년대의 소련 경제를 건강하다고 진단했다. 1990년대 말 이들은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 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결론지었지만 이 역시 잘못된 것이었다.
모이니핸은 비밀주의가 규제와 관료적 통제의 한 형태가 됐다고 지적했다. 정보가 곧 힘이라고 믿는 정부 인사들은 정보 공유를 원하지 않았고 이를 모아 관리하는 정밀한 제도적 장치를 개발했다. 이들은 잘못을 은폐하고 곤혹스러운 상황이나 불법적인 행위를 기밀로 분류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리처드 닉슨의 법무차관은 베트남전쟁의 와중에 터져 나온 국방부 기밀문서 공개와 관련해 1989년에 작성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개된 기밀문서에서 미국의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만한 실낱같은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비밀 문건 분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방대한 분량의 문서를 기밀로 지정하는 1차적인 목적이 국가 안보 우려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난처함을 가리기 위함임을 곧바로 알아챌 것이다.”
민주적인 정부는 투명성을 요구한다. 시민들이 정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정부는 이들의 정보 접근을 차단하는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한다면 정부의 책임을 묻고 견제하기란 불가능하다.
디지털 시대로 들어서면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뉴욕대 교수이자 닉슨도서관 관장을 지낸 티머시 나프탈리는 “지금 우리는 기밀 문건의 쓰나미를 겪고 있다”며 “수만 건의 e메일, 파워포인트, 온갖 종류의 문건들이 클라우드의 어딘가에 저장돼 있지만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기밀 해제 작업을 담당하는 직원들의 수는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단일 문건의 기밀 해제 요청이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담당 기관에 접수될 때까지 꼬박 5년이 걸린다. 컬럼비아대의 매슈 코넬리는 매년 기밀 정보를 지정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국고에서 지출하는 비용이 180억 달러에 달하는 반면 비밀 해제 작업에 투입하는 비용은 1억 달러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대다수의 대통령 후보는 정부 기밀 공개를 약속한다. 하지만 일단 백악관에 입성하게 되면 대중의 감시와 평가로부터 그들의 행동을 가려주고 실책을 덮어주는 기밀 정보 지정 시스템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지금 우리는 방대하고 복잡한 군사정보 비밀 유지 체제의 적용 대상을 점차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불량한 정책 결정과 책임지지 않는 정부를 만들어내는 위험한 레시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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