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로 3년을 열심히 일하다 보니 숙련공이 됐고, 숙련공으로 3년을 더 사니 기능공, 내친김에 3년을 더 노력하니 석·박사 전공자들과도 편하게 의견을 나누는 전문가가 돼 회사를 경영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오기로 버텼던 그 석삼년이 제 성공의 초석이 된 것 같습니다.”
화장품 용기 제조 업체인 우성플라테크를 창업해 직원 3명의 회사에서 250여 명이 일하는 연 매출 500억 원의 강소 기업으로 키워낸 허남선 전 회장이 성공을 일군 비결을 묻는 말에 “그저 매일 최선을 다한 것뿐”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을 평범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침에 신고 나간 흰 양말이 까맣게 변해 돌아오는 날이 40여 년간 이어졌다. 허 전 회장은 “지금이야 고졸 학력이 흠도 아니고 고졸로 성공한 사람들도 많지만 1970~1980년대는 대학을 나온 ‘화이트칼라’와 ‘공돌이’가 철저히 구분되던 때였다”며 “기댈 곳 하나 없는 흙수저에 대학도 나오지 못한 공돌이가 가족을 지키고 자식에게 흙수저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는 몸이 부서져라 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세운 우성플라테크는 화장품용 유리 용기를 대체하는 플라스틱 용기를 국내 최초로 개발해 LG생활건강은 물론 로레알·랑콤 등 글로벌 명품 화장품 회사들의 러브콜을 받으며 20여 년 만에 아시아 업계 1위, 글로벌 3위로 자리매김한 기업이다. 허 전 회장 역시 기술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 명장인 167호 ‘기능한국인’이 됐다. 또 회사 이익의 30%는 직원 복지, 30%는 기술 개발, 30%는 미래 투자, 10%는 사회 환원을 한다는 ‘3:3:3:1’ 원칙을 창업 당시부터 회사 정관에 새겨 넣어 20년 이상 지켜오는 등의 모습으로 2020년 ‘존경받는 기업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런 허 전 회장이지만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단어는 ‘흙수저 공돌이’였다. 2021년 건강상의 문제로 소중히 키운 회사의 지분을 매각하고 지난해 연말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그는 최근 자신의 63년 삶을 담은 자서전을 펴냈는데 책 제목에서도 ‘흙수저 공돌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굳이 치부를 드러낼 필요가 있느냐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가난’과 ‘공돌이’를 빼고는 도무지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일례로 그는 “강원도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난 ‘K장남’으로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에 짓눌려 위궤양까지 걸린 중학생”이라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동양 최고의 기능 인재를 육성하겠다며 1972년 설립한 금오공고의 5회 졸업생이라는 사실 역시 그의 정체성의 핵심이다.
허 전 회장은 “금오공고의 3년이 없었다면 지금의 허남선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전자 및 중화학 산업을 육성하던 1970~1980년대에는 금오공고를 비롯한 전국 15여 개의 전문 기술공고에서 수만 명이 쏟아져 나와 산업 역군이 됐다”며 “그 시대는 ‘공돌이’들에게 잔인했지만 기름때 묻히고 일했던 우리 공돌이들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이 지금 같은 경제 대국을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런 그이기에 은퇴 후 인생 2막에는 나눔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하며 모교 재학생과 동문을 먼저 떠올린 것은 당연한 결과다. 허 전 회장은 지난해 장학금 10억 원을 쾌적해 장학재단 ‘금오평산장학회’를 설립했다. 기존에 하고 있던 범죄 피해자 지원 등 월 수천만 원 규모의 지역 환원도 계속 유지할 계획이라고 한다. 허 전 회장은 “어차피 맨손으로 태어난 인생인데 더 간절한 사람에게 조금 나눌 수 있다는 건 매우 큰 보람”이라며 웃었다.
“장학 사업은 어쩌면 인생의 가장 큰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금오공고 재학생과 동문만을 지원하는 목적에 한정돼 있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사업을 점차 확장해 유망한 젊은 친구들을 더 많이 돕고 싶습니다. 흙수저 공돌이가 세운 작은 재단이지만 알차고 오랫동안, 대를 이어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초석을 다져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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