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식시장은 투자자들이 기업 실적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세법안에 대한 추이, 무역 협상에 대한 진전 여부 등을 살펴보면서 하락 마감했다. 그동안 증시를 끌어올렸던 미·중 긴장 완화에 대한 안도감은 상승 재료로서 동력이 약해지는 분위기다. 미국 정부 부채와 관세에 따른 경제 불확실성이 투자자 심리의 밑바닥에 자리잡은 가운데 이날 투자자들은 증시가 이제 과매수 단계에 들었다고 보고 매수 고삐를 늦추고 있다.
20일(현지 시간) 뉴욕증시에서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는 114.83포인트(-0.27%) 내린 4만2677.24에 거래를 마쳤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은 23.14포인트(-0.39%) 떨어진 5940.46에,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종합지수는 72.75포인트(-0.38%) 하락한 1만9142.71에 장을 마감했다.
월가는 이날 하락의 직접적인 원인은 그동안 급등에 따른 차익실현이라고 봤다. 밀러 타박의 수석시장 전략가인 매트 말리는 “증시의 모멘텀이 꽤 강하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고 다만 시장이 단기적으로 보면 과매수 상태기 때문에 언제든 매수를 멈추고 한 숨 돌리는 상황이 올 수 있다”며 “만약 이런 기간이 추세 역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증시는 다시 최고가에 도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즈호증권의 다니엘 오레건은 “이번 하락의 원인으로 많은 사람들이 과매수 상황에 따른 이익 실현을 이유로 들고 있다”며 “트럼프의 감세 정책에 대한 장애물과 ‘셀 아메리카’ 불안감도 전반적으로 여전하다”고 이날 증시 하락 원인을 설명했다.
대형 기술주들은 부진한 흐름을 보였다. 거대 기술기업 7곳을 가리키는 '매그니피센트7'은 테슬라를 제외하면 모두 하락했다.테슬라는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가 향후 5년간 수장 자리를 지키겠다고 밝히면서 주가가 반등했다.
백신 제한, 풍력 프로젝트 허용…트럼프 정책에 일희일비하는 美 증시
이날 미국에는 굵직한 경제 지표나 무역 정책 발표가 없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분야별 정책 결정에 따라 관련 종목의 주가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의약주가 대표적이다. 이날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모든 연령층에 대한 코로나19 백신 접종 권고를 65세 이상 고령자와 고위험군에만 권고하는 쪽으로 수정했으며 나머지 건강한 일반인은 간소화된 절차를 적용하지 않고 백신의 효과와 안전성을 입증해서 승인을 받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백신에 대한 일반인들의 접근성이 제한된 것이지만 그동안 로버트 케네디 미국 보건장관이 백신에 회의론을 보였다는 점에서 업계는 예상보다 완화된 규제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모더나의 주가는 6.06% 올랐다.
에너지 등 유틸리티 주도 상승세를 보였다. 트럼프 행정부가 풍력 발전 등 재생에너지 사업에 대한 억제 정책에서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면서다. 트럼프 행정부는 뉴욕해안에 건설되는 50억 달러 규모의 풍력 발전소에 대한 공사 중단 명령을 해제했다. 이 프로젝트는 2027년부터 50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하는 사업으로 앞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화석연료 우선 정책을 추진하면서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한 달간의 작업 중단을 내린 바 있다. 캐시 호철 뉴욕 주지사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중단 명령을 해제했다고 발표했다.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이퀴너ASA의 주가는 2.38% 올랐으며 또다른 기업은 에버소스에너지와 도미니언에너지의 주가도 각각 3.18%, 3.2% 상승했다.
홈디포는 이날 실적발표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에 따른 비용 상승부담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인상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주가가 0.61% 하락했다. 투자자들이 수익성 하락을 우려한 탓이다. 앞서 월마트는 관세로 인한 비용상승분을 모두 흡수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부 가격을 인상하겠다고 밝혔다가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가격을 흡수하라. 지켜보겠다”며 압박을 받은 바 있다.
시장 곳곳에 관세·부채 불안감…앞으로도 美경제 계속 누를 것
이날 UBS는 최근 주가의 상승세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몇 달 동안 시장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날 것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불안요인은 크게 △무역 협상 부진으로 인한 상호관세 재개 △미국 감세 정책에 따른 적자 증가 가능성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하 지연 가능성이다. UBS글로벌 웰스 매니지먼트의 솔리타 마르첼리는 “투자자들이 여러 측면에서 불확실성에 직면하면서 변동성이 커질 것”이라며 “무역 협상에서 진전이 필요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감세 조치는 채권 시장에 압박을 가할 수 있다. 경제 역풍 우려가 커지면서 연준은 단기적으로 금리를 인하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고 짚었다.
EY-파르테논의 그레고리 다코 역시 미국이 높은 관세로 특징 지을 수 있는 ‘새롭고 정의되지 않은 현상’ 체제로 전환되고 있다고 봤다. 이 체제는 앞으로 경제를 계속 억누를 것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그는 이날 고객 이메일을 통해 “일시적 관세 유예 조치로 인해 미국의 평균 관세율은 25%에서 14%로 낮아졌지만 여전히1939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라며 “공급 측 충격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연준의 금리 동결도 계속될 전망이다. 알베르토 무살렘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는 이날 미국과 중국의 무역 긴장이 완화됐지만 관세에 따른 미국 경제의 부담은 여전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관세에 따른 인플레이션 영향을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금리 인하를 고려할 때는 아니라고 말했다. 무살렘 총재는 “지금 관세에 따른 인플레이션 영향을 무시하거나 완화적인 정책을 사전에 고려하는 것은, 인플레이션의 수준과 지속성을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다”며 “정책이 장기 인플레이션 기대를 훼손할 위험이 있을 때에는 가격 안정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며 관망기조를 한동안 유지할 방침을 시사했다.
이런 우려는 국채 시장과 금, 달러 시장에서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날 10년물 국채 수익률은 이날 4bp(1bp=0.01%포인트) 오른 4.491%에 거래됐다. 국채 수익률 상승은 가격 하락을 의미한다. 30년물 국채 금리는 7bp 오른 4.979%로 다시 5% 선을 눈앞에 두게 됐다. 무디스의 미국 신용등급 하락여파가 충격적인 수준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시장이 미국 정부의 부채증가 문제와 경제 전망에 계속해서 주목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달러도 하락했다. 6개국 통화가치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지수는 전날 100.43에서 하락해 100.05 수준이다. 달러와 달러 자산이 하락하는 동안 안전자산인 금 가격은 상승했다. 이날 뉴욕상품 거래소에서 금 선물가격은 온스당 64달러 가량(1.98%) 뛴 3297.60 달러에 거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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