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남도 작은 섬 만재도의 해변에서 물질에 나설 채비를 시작한 세 해녀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자식들은 뭍으로 보내고 남편도 먼저 보낸 이들은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는 이 세상 마지막 해녀들이다. 텔레비전을 좋아하고 농담을 잘 하며 잠수 전까지 화장을 하는 유쾌한 모습이 이어지지만 종종 숨길 수 없는 삶의 애환이 비친다. 산소 탱크도 없이 바닥 깊숙이 잠수하는 이들은 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그 과정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잃었다. 그래서 자녀가 해녀가 되겠다는 말만 꺼내도 마구 때려서 말렸다. 사랑하는 모두를 섬에서 멀리 쫓아버린 결과 세 해녀는 ‘엔들링스(종의 최후 개체)’가 됐다.
이야기가 대체 어디로 흘러갈지 궁금해지는 순간 ‘하영’이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된다. 하영은 지구 반대편 세계에서 가장 비싼 섬 뉴욕 맨해튼에서 고군분투하는 한국계 캐나다인 극작가다. 그는 “연극을 위해 내 피부색을 팔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백인 취향의 연극을 써왔지만 한국의 해녀 이야기에 백인 투자자들이 흥미를 보이자 끝내 피부색을 팔기로 결심했노라 비장하게 말한다. 지금껏 우리가 애달파했던 해녀들의 이야기는 정체성을 팔아먹은 ‘배신자의 작품’이라고 관객들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개막한 연극 ‘엔들링스’는 이처럼 두 개의 섬을 오가며 이주와 정체성, 창작과 진정성에 대해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이야기 전개 역시 단순하지 않다. 해녀의 삶과 극작가의 창작 과정이 교차하고 등장 인물들의 서사도 겹겹이 중첩된다. 일례로 해녀는 만재도에 사는 실제 해녀인 동시에 하영이 쓰는 희곡 속 주인공이다. 또 하영은 극중 연극을 집필하는 극작가인 동시에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로 지난해 미국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른 셀린 송을 연상하게 한다. 실제 ‘엔들링스’는 셀린 송이 쓴 희곡으로 하영은 셀린 송의 한국 이름이며 극중 하영의 남편이 백인이라는 설정도 현실과 유사하다. 연극 속 허구와 연극 밖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고 만재도와 맨해튼이라는 두 개의 섬에서 각자 살아가는 해녀와 하영의 세계가 부딪치면서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과 속도로 뻗어간다.
무거울 수 있는 주제이지만 유쾌하게 풀어간 연출이 돋보인다. 2019년 뉴욕에서 초연된 작품을 가져오면서 한국적 정서를 살리고 대중성을 높이려한 노력이 엿보인다. 일례로 귀에 익은 영화 오프닝이나 크게 히트한 미국 랩음악 등을 절묘하게 삽입하고 한글 자막이 움직이는 시각적 연출을 더해 바닷속 분위기를 살렸다. 세 해녀를 연기한 배우들의 세련된 유머와 연기도 집중도를 높이는 요소다.
무엇보다 짜임새 있는 서사의 매력이 크다. 100분의 러닝타임 동안 숨 돌릴 틈 없이 뻗어가는 이야기들이 과연 어떤 결말로 수렴될지 극이 전개될수록 점점 궁금해진다. 일부 대사가 다소 작위적이고 자의식이 과한 듯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만큼 작가의 솔직한 욕심과 진심이 보인다. 셀린 송이 “내게 가장 소중한 작품”이라고 부른 이유가 충분히 이해된다.
공연은 ‘지역’을 화두로 삼은 올해 두산인문극장의 두 번째 공연 프로그램이다. 개막 전 전석 매진된 작품은 6월 7일까지 서울에서 공연된 후 대전예술의전당(6월 13~14일)과 제주아트센터(6월 27~28일)로 무대를 옮겨 지역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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