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현지 시간) 싱가포르 지하철 시청역 인근에 위치한 복합쇼핑몰 래플스시티의 한 스타벅스 매장. 기자와 동행한 싱가포르인 제레미아 푸(27) 씨는 커피 값 결제를 위해 점원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QR코드 결제를 하기 위해서다. 결제는 동남아에서 널리 쓰이는 슈퍼앱 그랩의 ‘그랩 페이’ 서비스를 통해 이뤄졌다. 겉보기에는 국내 간편결제사들의 서비스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푸 씨가 지불한 것은 현금이 아니라 싱가포르 기업 스트레이츠엑스(StraitsX)가 발행한 싱가포르달러 연계 스테이블코인인 XSGD다. 최근 국내에서도 발행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법정화폐 연동 스테이블코인이 싱가포르에서는 이미 실생활에서 자유롭게 쓰이고 있는 것이다.
스트레이츠엑스는 2020년 싱가포르 금융관리청(MAS)의 승인을 받아 XSGD 발행을 시작했다. 글로벌 가상자산 시황 중계 사이트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이날 기준 XSGD의 시가총액은 1014만 달러, 24시간 거래량은 96만 달러 수준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자 스테이블코인 시총 1위인 테더(USDT)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그랩과 손을 잡으면서 오프라인 결제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워나가고 있다. 그랩 페이에서는 XSGD뿐 아니라 비트코인, 이더리움, USDT, 유에스디코인(USDC) 등 5종의 가상자산을 오프라인 결제에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생각했던 것만큼 스테이블코인 결제 과정이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결제를 위해서는 먼저 그랩 페이에서 가상자산 지갑을 생성해야 했다. 이후 본인이 가입한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스테이블코인을 구매한 뒤 이를 그랩 페이 지갑으로 전송한 뒤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가능했다. 가상자산 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이용자 입장에서는 지갑 생성이나 가상자산 구매, 전송 과정이 번거롭고 어렵게 느껴질 법 했다. 푸 씨의 생각도 비슷했다. 푸 씨는 “싱가포르에는 그랩 페이 가맹점이 많아 사용처는 충분하지만 다소 어려운 과정 때문에 신용카드 대신 쓰지는 않는 분위기”라며 “아직은 가상자산이나 테크 산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지만 서비스가 점차 발전하면 이를 활용하는 이들도 자연스럽게 늘 것 같다”고 말했다.
스테이블코인의 장점으로 꼽히는 편리한 국경 간 결제도 아직까지는 자유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현재 그랩 페이에서 가상자산 결제를 하려면 싱가포르 전화번호가 필요하다. 우회하는 방법을 쓰더라도 국내 거래소에서 가상자산을 구매한 뒤 해외 거래소로 보내고 이를 또다시 그랩 페이로 이동시켜야 했다.
물론 사용자 입장에서 체감할 수는 없지만 한국인이 그랩 페이 가맹점에서 결제를 할 때 XSGD가 활용되기는 한다. 카카오페이로 그랩 페이 가맹점에서 결제를 하면 카카오페이와 제휴한 알리페이를 거쳐 스트레이츠엑스에 전달되고, 스트레이츠엑스는 이를 XSGD로 변환해 싱가포르의 상점 주인에게 전달하는 식이다. 국경 간 결제에서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국내 가상자산 인프라 기업 DSRV도 아시아 스테이블코인 산업 핵심 인프라 구축을 목표로 최근 스트레이츠엑스와 전략적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DSRV는 자사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체인 간 브리지 기술을 기반으로 싱가포르의 스테이블코인과 상호 연동 가능한 결제 인프라를 개발할 예정이다. 각국 지역 결제 서비스 제공업체 간 상호 연동을 통해 국경 간 실시간 결제도 가능하게 한다는 목표다.
이처럼 스테이블코인의 실물경제 침투가 현실화하면서 국내에서도 발 빠르게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에서는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전날 스테이블코인 발행 근거를 담은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발의하며 이제야 첫발을 뗀 상황이다. 싱가포르는 2023년 스테이블코인 규제 프레임워크를 시작으로 민간 활용을 독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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