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혈액 검사만으로 소아 뇌혈관질환인 모야모야병을 진단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암과 희귀질환으로 고통을 겪는 어린이들을 위해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의 유가족이 내린 사회 공헌 결단이 또 하나의 결실로 이어졌다.
김승기 서울대병원 소아신경외과 교수와 고은정 제이엘케이 박사, 최승아 소아암·희귀질환지원사업단 연구교수는 소아 모야모야병 환자의 혈장에서 'miR-512-3p'라는 새로운 바이오마커를 발굴해 그 기능과 작용 기전을 규명했다고 31일 밝혔다.
모야모야병은 특별한 원인 없이 대뇌에 혈액을 공급하는 내경동맥에서 가지 치는 부위의 혈관이 서서히 좁아지는 만성 진행성 뇌혈관질환이다. 병이 진행될수록 혈류가 부족해지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미세혈관이 자라난다. 그러나 이 혈관들은 충분한 혈액을 공급하지 못하고 터지기 쉬워 심각한 소아 뇌졸중을 유발하게 된다.
현재 모야모야병 진단의 표준검사로 쓰이는 뇌혈관조영술은 동맥을 통해 가늘고 긴 카테터를 삽입하는 침습적 방법이어서 특히 소아에게 부담이 컸다. MRI(자기공명영상)·MRA(자기공명혈관조영술) 같은 비침습적 검사의 경우 혈관 협착이 과장되게 나타날 수 있고 뇌기저부의 혈관을 자세히 평가하기 어려워 모야모야병의 조기 진단과 진행 상태를 정밀하게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연구팀은 모야모야병 환자 23명과 건강한 대조군 13명의 혈액에서 세포외소포(EV)를 분석해 miR-512-3p라는 바이오마커를 발견했다. 세포외소포는 마이크로리보핵산(miRNA)과 같은 유전자 정보를 포함하고 있으며 세포 간 신호 및 물질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분석에 따르면 모야모야병 환자의 miR-512-3p 발현 수치는 대조군에 비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았다. 연구팀은 miR-512-3p가 혈관 형성 조절 경로인 RHOA 신호전달계에 작용해 ARHGEF3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함으로써 혈관 생성을 방해함을 확인했다. miR-512-3p가 RHOA 경로를 통해 비정상적인 혈관망을 유발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규명한 것이다.
연구팀이 miR-512-3p의 기능을 억제했더니 GTPase 활성이 2.3배 증가하고 혈관내피전구세포에서 혈관 형성 능력이 1.7배 향상됐다. GTPase는 세포의 이동과 혈관 형성을 촉진하는 중요한 신호 경로다. 이는 miR-512-3p가 모야모야병의 진단 마커일 뿐 아니라, 치료 표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miR-512-3p의 모야모야병 진단 정확도는 AUC(곡선하면적) 0.82 수준으로 높게 평가됐다.
김승기 서울대병원 소아신경외과 교수는 "혈액 검사를 통해 모야모야병의 조기 진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중요한 연구"라며 "이 바이오마커를 활용해 소아 환자들이 질병을 조기에 진단받고, 맞춤형 치료를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한국연구재단과 서울대병원 연구기금,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사업의 지원으로 진행됐다. 연구팀은 miR-512-3p 발현 수치를 통해 모야모야병을 진단하고 ARHGEF3 유전자를 활용한 치료제 스크리닝 방법에 대한 기술로 국내 특허 등록을 마쳤다. 연구 결과는 네이처의 자매지인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 최신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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