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신사업을 정해야 하는데 기관장이 바뀔 예정이라 경영상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학기술 관련 사업은 대개 장기간 이뤄지기 때문에 새 기관장이 오면 방향을 설정하고 시작합니다. 조만간 나갈 사람이 기관장으로 있으면 그 어떤 사업도 추진하기가 어렵습니다.”
국내 한 출연연구기관 소속 A 연구원의 하소연이다. A 연구원이 속한 기관은 수개월째 기관장 공백이 이어지고 있다. 기관장 인사가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A 연구원은 “기관장 인사가 차일피일 미뤄지면 조직원들의 연구 일정에까지 영향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불안감을 토로했다.
18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의 주요 수행 기관인 25개 출연연과 4대 과학기술원 중 기관장 임기가 만료됐거나 만료가 임박한 곳은 총 8곳이다. 한국한의학연구원·한국뇌연구원·한국과학기술원(KAIST)·국가녹색기술연구소 등 4곳은 이미 원장 임기가 끝났지만 후임을 구하지 못해 유임 중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한국전기연구원·한국화학연구원은 다음 달부터 내년 초까지 차례로 원장 임기가 끝나지만 역시 후임 인사 절차에 들어가지 못해 유임이 불가피하다.
KAIST와 한의학연은 특히 지난해 4월과 7월 임기 만료에 맞춰 차기 기관장 후보 3인을 추리는 절차까지 완료했지만 이후 1인을 뽑은 이사회가 1년 넘게 열리지 않고 있다. KAIST 이사회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회가 다음 달 초 예정됐지만 기관장 선임 안건은 이번에도 오르지 않을 것으로 전해졌다. 과기정통부 산하 기초과학연구원(IBS)도 상황이 비슷하다. 노도영 IBS 원장이 1년 가까이 임기를 연장 수행한 뒤 다음 달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새 원장 선임 절차는 지난해 11월 서류 심사 단계에서 절차가 멈췄다. 올해 신임 원장이 선임된 한국생명공학연구원·한국건설기술연구원·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경우 7~8개월의 수장 공백기를 거친 끝에야 정상화했다.
연구기관장은 기관의 연구 방향을 설정하고 국가 R&D 과제를 이끌며 예산 집행, 기술사업화, 국제 협력을 이끄는 역할을 맡는 만큼 리더십 공백이 길어질수록 R&D 추진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특히 정부는 올해 정권 교체를 계기로 지난 정권에서 삭감됐던 R&D 예산을 대폭 증액하는 동시에 연구과제중심제도(PBS) 폐지, 글로벌톱(TOP)전략연구단 사업, 인재 유치 사업 등을 통해 출연연 전반의 역량 혁신을 추진 중이다.
게다가 KAIST와 IBS는 수장이 장관급 대우를 받을 정도로 국가 과학기술 전략을 조율하는 상징성과 집행하는 예산 규모도 커 리더십 공백이 특히 치명적이다. 일례로 IBS는 2012년부터 2023년까지 출판한 논문 중 피인용 횟수 상위 1% 논문(HCP) 비중이 글로벌 주요 과학기술 연구기관 15곳 중 2위에 오를 정도로 국내 연구 성과를 주도하고 있다.
출연연의 한 관계자는 “원장 임기가 1년을 남긴 3년 차에 접어들면 이미 레임덕이 온다”며 “언제 나갈지 모르는 사람을 기관장 자리에 계속 앉혀 놓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기관장 공백이 길어질수록 연구의 연속성, 예산 투명성, 조직 안정성이 약화된다”며 “정책 기조는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을 강조하지만 실제 기초연구를 수행해야 할 R&D 현장에서 필요한 리더십은 제때 세워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리더십 공백이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두고 출연연 총괄 기관인 NST의 인사 권한이 유명무실한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실질적인 인사 추천과 검증은 대통령실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는데 정권 출범과 고위직 인사, 또 최근 국정감사와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같은 주요 행사에 밀려 출연연 인사는 후순위가 된 것이다. 게다가 전 정권에서 임명된 김영식 이사장이 이끄는 NST와 정부 간 불협화음도 불가피하다는 게 과기계의 전언이다.
국회는 올해 초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며 출연연 원장 임기가 만료되기 3개월 전에 후임 선임 절차를 시작하도록 했지만 이 역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현행 기관 성과 평가를 통해 우수한 평가를 받은 기관장의 연임 여부부터 정해야 후임 인사를 시작할 수 있다. 기관 성과 평가가 늦어지면 후임 인사도 순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에 기관 성과 평가가 나오지 않는 곳들은 법적 의무가 적용되지 않는다. 실제 원자력연과 ETRI도 다음 달 임기 만료를 앞두고 지난달에야 평가 결과가 나왔다. 과기정통부는 문제 해결을 위해 내년부터 기관 평가 제도를 개편하겠다는 방침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wise@sedai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