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연구에 착수해 지금까지 3번째 버전이 나온 HRP는 아시모보다 속도는 느리지만 작업을 할 수 있는 기능은 월등하다. 2004년 국내에서 선보인 로봇 휴보는 다섯 손가락 관절을 사용해 가위 바위 보를 할 수 있고, 사람 손을 살포시 잡고 악수도 한다. 하지만 걷는 하체운동과 팔을 흔드는 상체운동을 동시에 하지는 못한다.
균형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 후에 나온 마루는 춤을 추고 태권도 동작도 할 수 있지만 사람을 닮은 서비스 로봇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기술을 개발해 내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음식과 청소를 하고, 아이를 돌보며, 심부름을 하는 가사 로봇. 이들로 인해 주부는 일손을 덜고 사고에서 목숨도 구하는 생활은 인류의 상상 속에서 진부하리만큼 낯익다.
지금은 중년이 된 사람들이 어린 시절 보고 자란 만화영화에서부터 최근의 공상과학(SF) 영화 아이 로봇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닮은 로봇은 친숙하고 심지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진짜 로봇을 만드는 공학자 입장에서 그처럼 당연한 생각은 어떻게 비칠까. 아마도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만든 그 어떤 움직이는 기계가 바퀴를 놔두고 발로 걷는다는 말인가. 걷는 로봇, 그것도 두 발로 걷는 로봇을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만화의 로망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힘 좋은 모터로 시속 100㎞를 갈 수 있는 수단을 놔두고 고작 시속 수㎞에 그칠 뿐더러 조금만 기울어지거나 바닥이 불균형하면 여지없이 넘어지고 마는 두 다리를 로봇에게 부여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사람처럼 계단을 오르내리고 문지방을 넘어 다니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사람과 같은 생활공간에서 지내기 위해서다. 그러니 가사 도우미나 장애인 도우미 같은 서비스 로봇을 개발하려는 연구자들은 필히 두 다리를 가진 보행 로봇을 고안해야 했다.
최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인지로봇연구단(단장 유범재)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상체를 움직이며 걸을 수 있는 로봇 ‘마루’를 선보였다.
춤을 추고 태권도 동작을 할 줄 아는 로봇 마루는 연구 목표로 삼고 있는 서비스 로봇 개발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 연구 성과물이다.
■ 두 발로 걷는 로봇 어디까지
일본의 과학자들은 어린 시절 봤던 ‘철완 아톰’의 추억으로 인해 이족 보행 로봇에 목을 매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지난 2000년 일본 혼다사가 처음 ‘아시모’를 발표했을 때 전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시모는 그 이전에 숱하게 있었던, 걷는 흉내를 내는 로봇이 아니라 정말 두 발로 걷는 로봇이었기 때문이다.
탄생 이후 해마다 아시모의 진화는 눈부셨다. 아시모는 멈춰 서서 방향을 돌린 뒤 다시 걷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방향을 틀 줄 알았다. 또한 시속 6㎞ 정도까지 속도를 높여 달리기를 하는 것도 가능했다.
배낭처럼 보이는 배터리를 지고 전원 케이블 없이 40분 동안 구동할 수 있다. 장애물은 스스로 피해간다. 사람 말을 알아듣고 명령을 수행할 줄도 안다.
그래서 아시모는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접대하거나 과학관에서 안내자 역할을 하는 등 사회생활을 하는 서비스 로봇의 역할을 이미 시작하고 있다.
일본의 국립산업기술과학연구소(NIAST)가 지난 1998년 연구에 착수해 지금까지 3번째 버전을 발표한 ‘HRP’는 보행 속도가 시속 2㎞ 정도로 아시모보다 느리다. 하지만 작업을 할 수 있는 기능은 월등하다.
HRP는 얼음판처럼 미끄러운 바닥이나 좁쌀 같은 알갱이가 흩어져 있는, 요철 있는 바닥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다. 10㎝ 높이의 장애물이 있을 때에는 무릎을 들어 올려 사뿐히 넘어간다.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날 줄 아는 유일한 이족 보행 로봇도 HRP다. HRP는 뒤로 넘어지면 땅에 손을 짚고 일어나 균형을 잡는다. 또한 손발을 모두 사용해 기어가기도 하고, 사람과 널판지를 맞붙잡고 옮길 수 있다. 전기 공구를 쥐어주면 단추를 눌러 볼트를 맞추는 작업도 가능하다.
이처럼 다양한 상체운동 기능을 소화할 수 있는 보행 로봇으로는 HRP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4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오준호 교수팀이 개발한 ‘휴보’가 또 다른 충격을 안겨주었다.
휴보가 탄생하기 이전에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네 발로 걷는 로봇 ‘센토’를 개발한 적이 있었지만 휴보는 그 연구 성과를 이어받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축적된 기술이 없는 맨바닥에서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토록 훌륭하게 걷고 사람과 상대할 수 있는 로봇이 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었다. 휴보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연구 성과였다.
휴보의 보행 속도는 시속 1.25㎞에 불과하고, 걸으면서 방향을 틀거나 장애물을 넘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다섯 손가락 관절은 아시모보다 정교해서 가위 바위 보를 할 수 있고, 사람 손을 살포시 잡고 악수도 한다.
휴보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첨단기술전시회인 넥스트 페스트, 토리노 동계올림픽, 그리고 CNN의 특집 프로그램 ‘퓨처 서밋’ 등에 초청받아 참여하는 등 그 어떤 VIP보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국제 스타가 됐다.
하지만 휴보조차 상체 운동을 병행하면서 걷지는 못한다. 상체 운동, 예를 들어 팔을 흔들어 인사를 하거나 접시를 닦는 등의 행동은 몸 전체의 균형을 잃게 만드는 동작이어서 걸어가면서 균형을 잡기에는 한 단계 높은 기술이 필요한 탓이다.
최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유범재 박사팀이 선보인 마루의 전신 운동은 그러한 점에서 국내 로봇 기술의 한 획을 긋는다. 서울 하월곡동의 연구원 내에서 가진 시연행사에서 마루는 가요 텔미에 맞춰 원더걸스의 안무 그대로 춤을 추었다.
손목을 꺾어 허리춤에 댄 채 몸을 가볍게 흔들고, 스텝을 맞추면서 팔을 들어 바깥쪽으로 내뿌리는 동작을 했다. 또한 무릎을 굽히며 상체를 좌우로 살짝 돌리는 동작도 있었다.
마루는 걸으면서 두 팔을 들어 인사하듯이 흔들거나 양팔을 교대로 앞으로 쭉쭉 내뻗는 태권도 의 기본동작 몇 가지도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국내 최초의 춤추고 태권도 하는 로봇이라고 할 수 있다.
■ 상·하체 함께 움직이기 힘든 이유
이처럼 걷는 하체운동과 팔을 흔드는 상체운동을 동시에 하기 어려운 이유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만 균형을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KIST 인지로봇연구단의 유범재 단장은 “춤을 추거나 손을 흔드는 동작처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동작이 아닌 동작을 할 경우에는 로봇동력학적으로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다”고 설명한다.
사람의 경우에는 허리와 무릎, 발목 등에서 무의식적으로 근육과 관절을 움직여 넘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을 줄 안다. 로봇은 사람과 똑같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겉보기에만 그럴 뿐 사람과 똑같이 동작할 수 없다.
이유는 물론 로봇과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로봇은 목이 360° 돌아가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원 케이블과 모터 등이 빼곡하게 들어찬 로봇의 속사정은 전혀 다르다. 근육과 뼈가 말랑하게 섞인 사람보다 오히려 움직임이 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마루와 성인 남자의 신체를 비교해 보면 사람의 손은 15개의 관절을 갖지만 마루는 4개뿐이며, 특히 눈은 전혀 돌릴 수 없다. 또한 키는 마루가 150㎝로 성인 남성의 평균치(174㎝)보다 훨씬 작은데도 팔 무게는 사람(4.5㎏)보다 30% 무거운 6㎏이다.
유 박사는 “결국 로봇이 팔을 앞으로 들어 올리면 사람보다 더 큰 힘을 느끼게 되고 앞으로 넘어질 위험이 크다는 뜻”이라며 “걸으면서 이 같은 힘의 균형을 잡는 데 있어서 로봇 고유의 동력학적 특성을 제대로 제어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루가 제한적이나마 상-하체를 동시에 움직이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것은, 사람과는 다른 신체적 특성을 가진 로봇에 맞게끔 사람의 행동을 변환시키는 알고리즘을 개발해 낸 덕분이다.
‘전신운동 계획/생성 기술’로 불리는 이 기술은 사람의 동작 데이터를 로봇이 읽고, 이를 자신에게 맞게끔 동작을 만들어 내는 알고리즘을 가리킨다. 즉 사람의 동작을 가능한 한 흡사하게 모방하지만 로봇이 동력학적으로 안정성을 잃지 않도록 계산을 거쳐야 한다.
결과적으로 로봇의 동작은 보폭이 더 짧고, 관절의 운동범위는 좁으며, 운동속도 역시 사람의 70% 정도로 느리게 나타난다.
KIST 연구팀은 이와 함께 사람의 동작을 따라 하는 원격제어기술도 개발했다. 즉 사람이 모션 캡처를 붙이고 움직이면 로봇은 사람의 움직임을 읽고 실시간으로 따라할 수 있다.
이 원격제어기술과 함께 로봇이 환경을 컨트롤하는 알고리즘, 즉 문을 미는 동작을 할 때 문이 손을 미는 반작용을 감지해서 적절하게 힘을 조절하도록 하는 알고리즘이 결합되면 로봇은 사람의 동작을 배워서 따라 할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로봇 기술은 결국 유리창을 닦거나 컵을 들어 옮기는 등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서 인간의 동작을 할 수 있는 서비스 로봇 개발을 목표로 한 것이다.
화성 표면에 착륙해 혼자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지구로 영상을 전송하는 화성 탐사로봇 스피릿은 매우 똑똑한 지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전혀 사람의 모습을 닮지 않았고, 다리가 있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사람과 함께 생활할 정도가 되려면 어떤 기술이 얼마나 필요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또 일본처럼 앞선 연구자들의 기술 내용을 세세하게 알기도 어렵다.
팔을 흔들면서 걸을 줄 아는 마루는 휴보의 기능을 한 차원 뛰어 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땅바닥에 1㎝ 높이의 장애물만 있어도 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HRP는 이러한 장애물을 사뿐히 넘어가지만 전신운동 계획/생성 기술의 수준이 한 차원 높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정도일 뿐 구체적으로 벤치마킹할 기술 내용은 알기 어렵다.
KIST의 김창환 연구원은 “일본의 휴머노이드 개발자들이 기술을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고, 논문으로 공개된 기술조차 재현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 일본 연구자들이 정말 어떤 기술을 갖고 있는지는 우리가 가장 궁금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유범재 단장은 “현재 마루를 통해 구현되고 있는 전신운동 기술은 HRP의 80~85% 수준으로 볼 수 있다”며 “앞으로 기술 수준을 높여 서비스 로봇을 실용화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자들은 오늘 또 다시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일하는, 사람을 닮은 로봇을 꿈꾸고 있다.
김희원 한국일보 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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