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사당한 사람의 사인을 밝히는 과정에서 은비녀를 구강과 식도에 밀어 넣은 후 색깔의 변화 여부를 살핀 것은 독극물인 유황이나 비소가 은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검은 막을 형성한다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법의학 지식뿐만이 아니다. 칠정산은 자체 역법을 바탕으로 한 우수한 달력이었으며, 신기전은 설계도가 남아 있어 복원이 가능한 세계 최초의 로켓무기로 국제적 공인도 받았다. 선조들이 지녔던 법의학 지식과 과학기술이 세계적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료제공: 한국산업기술재단 기술과 미래
최근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 과학기술도 마찬가지. TV의 다큐멘터리에서 전통 과학기술을 조명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으며, 드라마의 경우에도 전통 과학기술에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지난해에는 전통 과학기술을 주요 소재로 한 영화도 개봉됐다. 우리나라의 전통 과학기술이 미래의 과학기술상(象)과 직접 연관 되는 경우는 많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과거 우리 선조들이 몇몇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영화 속에 나타난 법의학 지식이 나 전통 과학기술을 살펴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과학수사대, 별순검
첨단과학기술에 의한 범죄증거 수집과 추리과정을 다룬 과학수사대 (CSI; Crime Scene Investigation)라는 외화 시리즈가 최근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그것도 조선시대에 CSI와 비슷한 과학 수사대가 있었다. 바로 별순검이다.
일반적으로 황궁 숙위 및 경찰 임무를 수행하는 관리를 순검이라 고 하고, 그 중 제복을 입지 않은 채 비밀정탐 임무에 종사하는 자를 별순검이라고 불렀다. 결국 별순검은 정보 임무를 맡은 오늘날의 사복형사와 비슷한 직분인 셈이다.
별순검은 최근 드라마로 만들어져 공중파와 케이블TV에서 상영됐다. 조선시대판 과학수사대인 별순검을 소재로 한 드라마, 그리고 후속 시리즈는 조선 시대 말기와 대한제국 선포 이후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비교적 현대에 가까운 시기다.
하지만 그동안 개봉된 몇 편의 영화들은 이보다 앞선 시기의 법의학 지식 및 과학적 추리과정을 보여 준다. 소설가 이인화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1995)’이 대표적인 사례.
이 영화는 정조 시대 왕권과 신권의 대립과정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사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이인몽(조재원 분)과 정약 용(김명곤 분)이 사건의 배후와 비밀을 파헤쳐가며 스토리를 진행한다. 특히 이 영화에서 형조참의로 나오는 정약용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답게 박학다식하고 과학적 추리에 능한 인물로 묘사된다.
정조의 명으로 선대왕의 서책을 정리하던 와중에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궁 궐 당직자의 사인이 석탄에 의한 질식사였음을 밝혀내는 것. 김미정 감독, 박진희 주연의 ‘궁녀(2007)’는 조선시대 숙종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구중궁궐에 사는 후궁, 그리고 궁녀들의 애환과 욕망을 다룬 일종의 미스터리 스릴러물. 장희빈이 낳은 세자 균(훗날 의 경종)의 출생을 둘러싼 비밀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한 궁녀의 의문스러운 죽음에서 출발한다.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나가는 수사관 역할을 맡은 사람은 내의녀 천령(박진희 분)이며, 궁녀의 사인규명 과정에서 상당부분 과학적 추리와 법의학 지식이 소개된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중에서 과학적 추리과정이 가장 돋보이는 영화는 김대승 감독, 차승원 주연의 ‘혈의 누(2005)’다.
이 영화는 조선시대 후기인 19세기 초 제지업이 번성한 가상의 외딴 섬 동화도를 배경으로 제지 수송선 화재와 참혹한 연쇄 살인사건을 소재로 전개된다. 수사관의 역할을 맡은 주인공은 화재사건 수사를 위해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 원규(차승원 분).
그는 명탐정 셜록홈즈 만큼이나 뛰어난 추리와 냉철한 과학수사 기법을 동원해 연쇄살인의 전모를 밝힌다. 이 같은 과학수사 기법은 섬 주민들의 근거 없는 공포, 그리고 무당 등 초자연적인 측면과 대비를 이루며 영화를 이끌어 간다.
주민들은 연쇄살인이 천주교도 일당으로 낙인찍혀 온 가족이 참형을 당한 강 객주 원혼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무당의 역할 역시 이 범주의 연장선상에 있다.
법의학 지식 기반의 수사기법
이들 영화에서 보듯 조선시대에도 나름의 법의학 지식을 기반으로 한 수사기법들이 활용됐다. 영원한 제국, 궁녀, 그리고 여러 드라마를 보면 변사당한 사람의 사인을 밝히는 과정에서 은비녀를 사용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시신의 구강과 식도에 은비녀를 밀어 넣은 후 색깔의 변화 여부를 보고 독살인 지 아닌지를 밝히는 것. 이는 독극물인 유황이나 비소 등이 은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검은 막을 형성한다는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 방법으로 사인이 판명되지 않을 때에는 시신의 입에 밥 한술을 넣어 두고, 일정 시간이 경과된 후에 꺼낸 그 밥을 닭에게 먹여 독살 여부를 판단했다고 한다. 불에 탄 시신이나 물에 빠진 상태에서 발견된 시신의 검시와 사인 판단은 현대 법의학과 큰 차이가 없다.
즉 불탄 시체의 경우 입과 코 안에서 재나 그을음이 발견되는지 검시했는데, 이는 화재가 직접적 원인이 돼 죽었다면 숨을 들이쉴 때 재나 그을음을 함께 마셨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반면 이미 죽은 후 시신이 불에 탔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에 빠진 경우에는 물거품을 중시했다. 사인이 익사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 입과 코에서 흰 물거품이 발견되는지 여부를 살펴본 것.
만일 물에 빠져 죽었다면 급하게 호흡하려다 물을 들이마시게 되기 때문에 이것이 폐와 기관지의 공기 및 점액과 섞여서 기포를 형성 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미 죽은 후 물에 던져졌다면 흰 물거품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인 검시방법으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시신의 상태와 주위의 정황을 상세하게 살피는 것인데, 특히 시신의 색깔을 중시했다. 죽음의 원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목이 졸려 죽은 시신이라면 정맥만 막히면서 피가 머리쪽으로 몰려 얼굴이 검붉은 색을 띠게 된다. 하지만 살해범들이 사인을 위장하기 위해 상처의 흔적과 색깔을 지우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상흔이나 사인이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감초 즙으로 시신의 해당 부위를 닦도록 했다. 만약 범인들이 다른 색소를 식초에 담가 바르는 방법으로 위장했다면 산과 알칼리의 중화반응으로 본래의 상흔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최신 과학수사 기법 가운데 혈흔을 감식할 때 자주 활용되는 루미놀 반응과 비견된다. 루미놀 반응이란 루미놀에 과산화수소와 헤민, 또는 혈액 을 더했을 때 파란 형광을 내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감춰진 혈흔을 찾는 것.
물론 조선시대의 방식이 현대의 루미놀 반응에는 못 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옛날에도 경험을 통해 축적된 상당한 수준의 법의학 지식을 나름대로 수사에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조선시대는 엄격한 유교적 윤리가 지배하던 사회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시신을 해부하는 방식의 부검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한계가 있었고, 잘못 알려진 과학 지식들도 더러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CSI와 비슷한 과학수사대가 있었다. 바로 별순검 이다.
잘못 알려진 과학 지식은 드라마의 과장적 재미 추구 과정에서 비롯되는 경향이 많다. 소설 동의보감을 원작으로 몇 년 전 TV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 허준이 스승인 유의태의 유언에 따라 눈물을 머금고 그의 시신을 해부해 봄으로써 훗날 명의가 될 수 있는 길을 닦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드라마적 허구일 뿐 그 시대에 시신 해부를, 그것도 존경하던 스승의 시신에 칼을 댄다는 것은 상상 도 못할 일이다.
또한 장희빈 등 궁녀가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궁궐에 입궁하려는 어린 여자의 손목에 앵무새의 피를 묻혀 봄으로써 처녀 여부를 감별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으로 본다면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밖에 핏방울의 응고 여부로 결정한 친자확인 방법도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잘못 알려진 과학 지식은 드라마의 과장적 재미 추구 과정에서 비롯되는 경향이 많다.
천문관측기기와 신기전
조선시대 중에서도 세종대왕이 통치하던 시기는 우리 역사상 전통 과학기술이 가장 발달했던 때다. 얼마 전 막을 내린 TV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도 세종대왕 때의 여러 가지 과학적 업적이 소개됐다.
측우기, 자동 물시계 자격루(自擊漏), 간의(簡儀) 등의 각종 천문 관측기기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또한 칠정산(七政算)은 당시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자체 역법을 바탕으로 한 대단히 우수한 달력이었다.
이천, 장영실, 이순지는 각각 이 시대를 대표하는 조선 최고 의 과학자, 공학기술자, 그리고 천문학자로 꼽힌다. 이 드라마를 보면 명나라와 세종 간 천문·역법을 둘러싸고 갈등 및 분쟁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장영실이 희생양이 되는, 즉 파직 당하고 낙향하는 대목이 나온다.
역사 기록에는 세종을 위해 만든 가마가 부서지는 바람에 천민 출신으로서 상당히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던 벼슬도 박탈당하고 투옥됐다고만 나온다. 자세한 내막이 없는 것. 이 같은 점과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살펴보면 명나라의 견제설이 어느 정도 가능성 있다고 볼 수 있다.
전통 과학기술, 그 중에서도 무기체계와 관련해 인기를 모았던 영화는 지난해 개봉된 ‘신기전(神機箭; 2008)’이다. 김유진 감독에 정재영과 한은정이 주연한 이 영화는 세종대왕 시기에 만들어진 로켓무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대국인 명나라의 횡포에 신음하며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던 세종이 명나라의 무기사찰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가공할 위력을 지닌 신형 로켓추진 무기를 개발한다는 게 핵심 줄거리.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과 픽션의 경계, 그리고 민족주의적 감수성을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전통 과학기술을 다룬 영화로서 꼼꼼한 고증을 거쳤다는 점에서 상당히 잘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이 영화를 자문한 로켓 전문가 채연석 전 항공우주원장은 오래전 옛날 기록을 바탕으로 신기전을 복원 및 발사하는데 성공한 바 있다. 또한 신기전은 설계도가 남아 있어 복원이 가능한 세계 최초의 로켓무기로서 국제적인 공인도 받았다.
물론 신기전이 로켓으로서 세계 최초로 발명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화약을 발명한 중국이 로켓 역시 처음으로 개발했기 때문이다. 실제 금나라의 로켓무기인 비화창이 13세기 몽골군과의 전투에 사용됐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 전투를 통해 로켓무기를 알게 된 몽골군이 이후 여러 나라와의 침략전쟁에서 활용, 서양에도 알려지게 됐다. 신기전은 고려 말기 최무선이 제조한 로켓 형태의 화기인 주화 (走火)를 개량해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에 소개된 것처럼 대·중· 소 신기전과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등 여러 종류가 있다. 화차가 제작된 이후로는 화차의 신기전기(神機箭機)에 중·소 신 기전 100개를 꼽고 발사 각도를 조절한 후 점화 선에 불을 붙이면 동시에 15발씩 차례로 100발이 발사됐다고 병기도설에 전한다.
그런데 화차를 발명한 사람은 바로 세종의 큰아들인 문종이다. 병약해서 제위 후 얼마 못가 병사한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오랫동안 세종을 보필해서 나름의 업적을 쌓았고, 측우기 역시 문종의 발명품인 것으로 밝혀졌다.
영화 신기전에서도 노쇠한 세종과 달리 세자인 문종이 상당한 카리스마를 갖춘 인물로 그려지는데, 나름의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신기전이 의주성의 국경지대 전투 등 실전에서도 사용됐다고 하는데, 영화에서처럼 엄청난 위력을 지닌 대량살상무기였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총통이 조선시대의 대표적 화기로서 더 자주 사용됐다.
글_최성우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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