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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5> 삼성전자 박차고 나와 영어 과외 시장 뛰어든 사연

김미희 튜터링 대표

'엉뚱함'을 재능으로 신사업 아이디어 도전

삼성전자 갤럭시 시리즈 탄생과 성공에 참여

페인 포인트인 '영어'를 아이템으로 사업화





‘남다른 엉뚱함’이란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각종 광고 공모전을 휩쓸었다. 졸업을 1년 앞둔 대학 3학년 때 삼성전자 공채 합격증을 거머쥐며 남다른 재능을 인정 받았다. 입사 후에는 갤럭시 시리즈의 사용자 경험(UX) 디자인을 맡아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갤럭시의 성장과 함께 실력을 키웠다. 직장 생활 10년 동안 아무리 돈을 써도 늘지 않는 영어 실력으로 고생하다 이를 사업화하겠다고 결심했다. 영어 튜터와 학생을 1대 1로 연결해주는 모바일 서비스로 사이트 오픈 3개월만에 가입자 8,000여명을 확보했고, 이런 추세라면 내년께 50억원 이상 매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미희(34·사진) 튜터링 대표의 당찬 창업 도전기다.

엉뚱함을 재능으로 발전시키다

건설업을 하는 아버지와 전업 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두살 위의 언니, 두살 아래 남동생과 함께 지극히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유달리 발명을 좋아해서 특별활동은 무조건 ‘발명반’을 선택했다고 한다. 과학상자 조립이나 수수깡으로 집 만들기 등 자신만의 스타일로 발명품 만드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과학상자 조립을 보면 설명서가 있는데 아예 쳐다 보지도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어요. 다소 어눌하고 겉보기에 형편 없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드는 데서 작지만 큰 희열을 느꼈던 거죠. 그런 독창성이 돋보였는지 웬만한 발명대회만 나가면 상을 휩쓸 정도였으니까요.”

김 대표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중학교 2학년 시기를 꼽는다.

“당시 신림동의 단독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 대문이 부서져 있고 집 안의 가전제품이나 가구에는 빨간 딱지(압류물 표목)가 붙어 있더라구요. 국제통화기금(IMF) 영향으로 아버지 회사가 부도를 맞았고, 저희 집까지 경매로 넘어가게 된 거죠. 봉천동의 단칸방으로 다섯 식구가 이사를 갔는데, 다 큰 딸들이 아버지, 남동생과 한 방에서 자는 것도 불편했지만, 친구들이 혹여 볼까 싶어 창피한 심정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김 대표의 어린 마음을 할퀸 것은 세 남매만큼은 제대로 키워보겠다고 아버지와 함께 새벽 야채 장사를 나간 어머니다. 평생 고생 모르고 나름 사모님으로 살아오다가 노점에서 야채를 팔겠다고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김 대표는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이 대목에서 김 대표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래서 그가 삼성그룹 채용 과정에서 이력서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어머니 이름 세 글자를 써넣어 면접관들이 당황하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쯤 살림살이가 다소 나아지면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지만, 세 남매에게 넉넉하게 사교육을 시켜줄 형편은 되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학원에 다니고 싶었지만 어머니에게 학원비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친구의 학원증을 빌리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도강(돈 내지 않고 강의를 몰래 듣는 것)’도 가끔 ‘감행’(?)했다고 한다. 그렇게 악바리처럼 노력해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던 그가 대학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 그때 고3 담임 선생님은 “너의 엉뚱함이 차별화된 능력으로 발휘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했으면 한다”며 광고홍보학과를 권했다.

“뭔가를 만드는 것도 좋아하니 아버지처럼 건축가가 되면 어떨까도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자신처럼 실패할까 싶어서인지 엄청나게 반대하셨어요. 그래서 광고홍보학과를 선택하게 된 셈이지요. 어릴 적부터 독서나 글쓰기를 워낙 좋아하기도 해서 이런 재능이 도움이 될 듯 싶었습니다.”

김미희 대표가 대학교 3학년 당시 각종 공모전에서 탄 상장과 트로피. /사진제공=김미희 대표


김 대표는 한양대 광고홍보학과 01학번으로 입학해 주전공인 광고마케팅에다 부전공으로 시각디자인을 선택했다. 언니와 남동생까지 삼남매가 대학에 다닐 때는 부모님의 등록금 부담을 덜기 위해 돌아가면서 휴학을 했는데, 김 대표는 휴학 기간 동안 국비 지원을 받아 6개월짜리 멀티미디어 전문가 과정을 수료했다. 포토샵, 일러스트, 플래시 등 당시 배운 멀티미디어 기술은 직장 생활이나 이후 창업 과정에서도 그에게는 소중한 자산이 됐다.

‘엉뚱함을 재능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광고홍보학과를 선택한 그의 의지가 통했는지 대학교 3학년 때부터는 제일기획 공모전 은상, 현대차 글로벌 마케팅 포럼 최우수상 등 광고업계에선 유명한 공모전을 휩쓸면서 재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러던 차에 삼성그룹에서 졸업이 1년 이상 남은 대학생 중 공채 시험을 볼 수 있는 전형 자격을 부여 받아 필기와 면접까지 합격했다. 김 대표는 “대부분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취업이 힘들다고 할 때라 삼성그룹에 합격한 사실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철저하게 비밀로 삼아 1년을 보냈다”고 말했다

원래 김 대표가 가장 들어가고 싶었던 계열사는 광고업계 부동의 1위인 제일기획이었고, 삼성전자는 2지망이었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제일기획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지만, 글로벌 업무 능력이 핵심이었던 제일기획에선 그녀의 부족한 영어 실력이 약점이 됐다. 그래서 2지망인 삼성전자에 다니게 됐다고 한다.

갤럭시 시리즈의 탄생과 성장을 만나다



2006년 2월 삼성전자에 입사한 그녀는 본사가 자리한 수원이 아닌 압구정동으로 출근하게 됐다. 당시 윤종용 부회장의 미래전략TF(태스크포스)에 배치를 받았기 때문.

“지금 와서 얘기지만 우선 몇 개월만 다니다가 광고대행사로 옮길 생각이었어요. 월급도 200만원으로 초임으로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내 ‘끼’를 발휘하기에는 안 맞는 곳이 아닐까 걱정이 됐던 거죠. 하지만 다니다 보니까 일이 매력적이더라구요. 미래전략 솔루션을 기획하고 개발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던 거죠.”

2009년 삼성전자 신입 사원 연수에서 후배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김미희 대표./사진제공=김미희 대표


그렇게 3년 동안 정신 없이 보내던 김 대표는 모바일 시장의 성장성에 주목했다. 그 동안 맡았던 업무가 영상 콘텐츠 솔루션 개발이나 B2B 마케팅 등 다양했지만 새롭게 뜨고 있는 시장에 직접 발을 딛고 싶었다. 삼성전자 미디어솔루션센터에서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미디어 서비스의 기획자를 내부 채용하는 중이었다. 그때가 2009년 5월이었다.

“삼성전자 내부에는 ‘잡포스팅’이란 특이한 리쿠르팅 제도가 있는데, 해당 부서에서 리쿠르트 공고를 내면 직원들이 몰래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이에요. 물론 부서장과의 면접도 주말에 이뤄져서 현업 부서에서는 전혀 모르지요. 뽑히면 깔끔하게 원하는 부서로 이동할 수 있고, 혹시 옮기지 못하더라도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하는 안전 장치인 셈이지요.”

그렇게 자리를 옮긴 그는 사용자 경험(UX) 디자이너로 지원, 모바일 디자인과 서비스 기획 업무를 맡았다. 갤럭시 S시리즈 초창기부터 사표를 낸 지난해 9월까지 갤럭시의 흥행 신화에 그녀도 참여할 수 있었다.

“수많은 서비스를 세상에 내놓았고, 그만큼 많은 서비스를 종료시켰습니다.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고 디자인하는 일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그 만큼 즐길 수 있었죠. 하지만 될 법한 서비스가 갑자기 (정책적인 이유 등으로) 사라지는 경우를 볼 때면 가끔씩 서비스 기획자로서 자괴감도 들었습니다.”

‘꿈의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김 대표는 자신의 창의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거대한 조직이 버거울 때도 있었다고 한다. 조직이 만든 틀에서 벗어나는 기획안을 올릴 때면 핀잔을 듣기도 했고, 사내 공모전에 사업 아이템을 제안했다가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그렇다고 대책도 없이 회사를 그만 둘 수도 없었다.

‘페인 포인트’를 사업화의 밑천으로 삼다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2014년 카이스트 MBA 과정을 밟을 기회가 생겼는데, 비즈니스 모델 전략을 수립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사내 공모전에 올렸던 10개의 아이템 중에서 3가지가 떠올랐다.

하나는 아이의 돌잔치를 준비하는 부모들을 위해 관련 정보를 한 곳에 모아놓는 사이트로 이름도 ‘돌써치’라고 지었다. 하지만 매년 신생아가 40만명 수준으로 시장 자체가 작은 데다 글로벌 아이템으로는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접었다. 또 하나는 여행과 해외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이어주는 ‘윙버디’라는 서비스로, 특정 날짜와 특정 장소를 남기면 SNS로 함께 여행할 친구를 매칭해주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김 대표 스스로 그 서비스에 대한 절실함이 없었다는 게 그 사업을 선택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됐다.



“나 자신에게 ‘페인 포인트(Pain Point)’가 깊은 분야가 아니다 보니까 절실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 스스로 불편함을 느꼈고, 이것을 개선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하는 건데 그렇지 못했던 거죠. 결론적으로는 학창 시절 내내, 그리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나에게 가장 큰 페인 포인트였던 영어 회화를 아이템으로 삼았습니다. 내가 그 서비스의 절박함을 진심으로 이해해야만 사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사내 공모전에는 화상 채팅을 모바일로 구현한다는 아이디어로 제안했었다. 카이스트 MBA 과정에서는 6개월 동안 비즈니스 모델의 SWOT를 충분히 검증할 수 있었다. 수업 중에 시장 조사 및 분석, 서비스 오픈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요소 등을 전반적으로 다큐멘테이션(Documentation·문서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 대표는 지금도 튜터링의 비즈니스 모델을 발표했을 당시 교수와 동기들의 뜨거운 반응을 잊지 못한다. 모두가 열광했고, 사업의 성공을 확신해주었다. 1년 간의 MBA 과정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한 그는 창업을 결심하고 2015년 9월 회사를 그만 뒀다.

2015년 카이스트 MBA 졸업식에서 김미희 대표가 어머니, 딸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사진제공=김미희 대표


“물론 사표를 내기까지 많은 망설임이 있었어요. 당시 갤럭시 S7 서비스 기획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일을 남겨 두고 나가는 게 많이 망설여졌지요. 하지만 더 지체하면 영원히 그만 두지 못할 것 같아 퇴사를 결심하게 됐죠. 물론 그 과정에서 남편과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지가 큰 힘이 됐구요. 지금 와서 얘기지만 남편은 제가 삼성전자를 다니면서 야근이 잦았기 때문에 창업한다고 나오면 오히려 시간이 많을 줄 알았나 봐요. 물론 지금이 훨씬 바쁘지만요.”(웃음)

김 대표가 창업을 결심한 데는 튜터링을 꾸려갈 파트너를 찾았다는 이유도 큰 역할을 했다. 한양대 선배로 교육 컨설팅 사업을 해왔던 최경희 부대표를 알고 지냈던 김 대표는 창업 결심이 서자 100쪽이 넘는 사업 기획안을 갖고 최 부대표를 무조건 찾아갔다. 서비스 디자인은 물론 모바일 프로토타입(Prototype·본격적인 상품화에 앞서 성능을 검증, 개선하기 위해 핵심 기능만 넣어 제작한 기본 모델)까지 개발해 놓았기 때문에 그녀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창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몸소 겪었던 최 부대표는 대기업에서 나와 창업하겠다는 후배를 오히려 말렸다.

“글자 그대로 삼고초려를 했어요. 처음에는 절대 못하겠다고 거절했는데, 제가 끈질기게 설득하니까 조금씩 마음을 열어주더군요. 언니가 거절한 이유도 오프라인 기반의 사업을 했기 때문에 온라인 기반의 사업은 자신이 없다는 것이어서 그건 제가 잘 할 수 있다고 설득했어요. 교육 전문가도 필요했고, B2B 세일즈도 중요했기 때문에 언니처럼 교육콘텐츠 기획, 영업, 학습 설계 등 관련 분야에서 10년 이상 경험이 있는 사람이 꼭 필요했죠. 게다가 교육의 주도권을 강사가 아닌 학생이 갖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에 있어서도 저와 의견이 같았어요. 교육 민주주의가 실현되면 학생의 니즈에 맞춰 커리큘럼을 짜는 개인화된 교육 시장으로 바뀔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튜터링의 탄생, 지금은 성장 진행형



3개월에 걸친 김 대표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긴 최 부대표는 합류하겠다는 최종 답변을 남긴 채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다. 파트너를 확보한 만큼 이제 사업을 시작해도 되겠다고 판단한 김 대표는 지난 2월 25일 법인을 설립했다.

튜터링의 강점 중 하나는 구성원의 오너십이다. 13명의 직원 중에서 CEO 출신이 4명으로, 이들이 창업한 횟수만 따져도 8번이다. 그만큼 다양한 창업 경험으로 다져진 팀이라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시장성도 밝다. 성인 영어 사교육 시장은 1조8,000억원으로 1인당 영어 교육에 소요되는 비용이 평생 2억원이 든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지난 9월 사이트 오픈 당시 김미희(앞줄 왼쪽 세번째) 튜터링 대표가 창업 멤버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튜터링


기존에 전화 영어나 화상 영어 서비스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소비자들이 만족할 만한 콘텐츠를 제공하지 못했다. 반면 개인 튜터를 고용하는 것이 효과적이지만 시간당 단가가 너무 높아 지속적인 교육이 어려웠다. 실제로 이러한 서비스를 모두 이용했던 김 대표는 기존 시장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소비자의 니즈에 맞춘 서비스를 내놓기로 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가격은 낮추되 강의 질은 높이는 것을 꼽았다. 또한 모바일 교육 서비스인 만큼 시스템의 안정성이 전제 조건이었다.

기존 전화 영어는 해외 현지 콜센터를 임대해 풀타임 선생님과 한인 매니저를 채용해 운영했다. 인건비가 저렴한 필리핀 강사를 대거 확보한 운영 방식은 유지 비용이 많이 들었고, 이는 소비자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화상영어는 스카이프, 위챗, 구글행아웃 등 기존 VOIP 플랫폼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인프라를 운영하지 않아도 되기에 가격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이용하기가 매우 불편했다.

지난 9월 본격 선보인 튜터링은 P2P(개인 대 개인) 플랫폼을 자체 개발, 강사와 학생 모두 모바일 앱만 설치하면 바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기존 중계시스템 구조를 개선한 덕분에 서비스 단가는 낮아지고 마진은 개선됐다. 실제로 필리핀 강사의 수업을 월 200분 듣는다고 가정하면 기존 화상 영어 비용이 10만~15만원 소요되는 것에 반해 튜터링은 3만9,000원 선이면 이용할 수 있다. 영미권 강사의 수업도 시중 가격의 절반 이하인 7만원 미만에 들을 수 있다. 김 대표에 따르면 소비자가는 50% 낮췄고, 튜터에게 지급하는 강사료는 30% 높여 양측이 만족할 만한 수익 구조를 가져갔다. 튜터 경쟁률도 높아 평균 10대 1에 달하고, 튜터의 국적도 필리핀 50%, 영미권 50%로 구성됐다.

우버의 택시 서비스처럼 강사가 대기하고 있고, 강사의 프로필이나 소개 영상을 보고 학생이 선택하면 실시간 모바일 영어 교육이 이뤄지는 방식이다. 자속에서도 음질과 콘텐츠 스트리밍이 문제가 없도록 완성도가 높였다는 것도 강점이다. 직접 제작한 40여개 카테고리에 맞춘 2,000장의 토픽 카드에 맞춰 이용자 관심사와 용도에 맞춰 학습할 수 있다. 토픽은 스피킹 시험, 면접 같은 실용적 분야부터 커피, 쇼핑, 영화, 스포츠 등 가벼운 주제까지 다양하다. 방송사, 기업, 병원 등 10여개의 콘텐츠 제공 파트너사도 확보했다.

“제가 전화 영어를 10년 동안 해봤는데 원어민 앞에서는 항상 긴장하게 되더라구요. 어떻게 하면 집에서 어학 연수를 하는 것처럼 효과도 높이고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삶의 다채로운 주제를 갖고 대화하는 방식이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현재는 성인 영어 사교육 시장에 초점을 맞춰 서비스가 개발되고 있지만 내년부터는 글로벌 시장에도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언어를 한국어와 중국어로 확장해 중화권을 대상으로 한국어 튜터링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이다. 글로벌 과외 시장이 120조원에 달하고, 이 중에서 90%가 아시아권에서 이뤄지는 만큼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다.

지난 9월 오픈 후 3개월에 접어드는 튜터링은 벌써 가입자 8,000명을 확보했다. 매주 평균 20% 이상씩 증가하고 있고, 가입자 중에서 10%가 유료로 전환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내년 매출이 50억원은 거뜬히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어머니의 희생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남들이 선망하는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창업의 길로 들어선 김 대표는 창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준비가 안 되면 절대 창업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준비가 된다는 건 내가 가진 아이디어를 포기하면 살면서 후회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템에 대한 확신, 내 역량을 결집해서 잘 할 수 있는 아이템인지 냉정하게 살펴보는 게 우선 필요합니다. 창업은 엄청난 희생을 요한다는 사실도 잘 알았으면 해요. 내가 누리고 있는 안락이나 평화 등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고, 창업 후 밀려오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겨낼 정도로 뜨거운 열정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보고 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창업을 선택하지 말라고 말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대표는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이 여기까지 오는 원동력이 됐다고 말한다.

“저희 남매가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도 어머니가 자식들 등록금을 대겠다고 급식조리사 일을 하셨어요. 원래 하얗고 고운 손이었는데, 자글자글한 주름에 설거지로 항상 부어있고 기름까지 튀어서 예전 모습이 하나도 남지 않은 엄마의 손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척 아팠어요. 회사 다니면 편하게 모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니까 딸내미 직장 생활에 지장 없게 하겠다며 손녀를 맡아 키워주셨지요. 친정이 신림동인데 제 집(광장동)까지 매일 2시간 이상 오가면서도 살뜰하게 제 딸을 챙겨주십니다. 엄마 덕분에 여기까지 왔고, 엄마의 희생이 저를 이만큼 성장시켰다고 믿어요. 그래서 저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은 저희 어머니랍니다.”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내내 김 대표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었다.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으로 17년 직장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기자의 눈가에도 덩달아 눈물이 맺혔다. 우리 여성들은 모두 또 다른 여성의 희생으로(그게 어머니가 됐든, 언니가 됐든, 혹은 베이비시터가 됐든) 직장 생활을, 혹은 사업을 유지할 수 있기에 더더욱 무소의 뿔처럼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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