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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다산의 經世民本이 그립다

임기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





흔히 ‘실학(實學)’이라 하면 조선 후기의 실용적 사상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당대의 실질적 경향을 지닌 사상’을 뜻하는 보통명사라고 한다. 그 사회를 이끌어가던 사상이나 이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새로운 시대정신이 이를 대체하는 법이다. 우리의 18~19세기는 공허하고 비참했던 공간으로 서구와 주변국들이 근대로 나아가는 동안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암흑의 길을 갔다. 그럼에도 사상과 문화 측면에서 실학과 국학을 통해 근대로 가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성호사설’로 유명한 이익의 개혁사상은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을 거쳐 박규수에 이르기까지 조선 말기 개화파의 명맥으로 이어진다. 연암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실현하기 위해 과학기술의 발전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청나라의 선진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업과 무역 발전을 위해 운송업을 일으키고 화폐의 유통을 늘리자고 제안한 연암을 조선의 슘페터라 칭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성균관 유생이던 다산은 정조 13년(1789년)에 28세의 나이로 장원급제하며 본격적인 벼슬길에 오른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고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해다. 다산은 1792년 정조의 명으로 화성 축성 계획을 세우고 거중기를 제작해 공사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당시 인구 740만명 수준이었던 조선은 이러한 기술을 본격적인 중공업으로 발전시키기에는 자본·인력·시장 등 모든 여건이 너무나 미흡했다. 다산은 중소상공업인이 주체가 돼 말업관(末業觀)을 극복하자고 역설했다. 다산에게 학문의 가치는 철학적 담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실행이 뒤따를 때 비로소 의미를 가졌다. 연암의 북학사상과 다산의 경세민본(經世民本)이 명백하게 근대를 지향하고 있었음에도 이 땅에서 상공업 중심의 혁신이 일어나지 못했음은 실로 안타깝다. 이들의 현장 중심 사고와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제대로 꽃을 피웠더라면 아마 조선에서도 1차 산업혁명의 불길이 일어났을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지 240년 후인 1876년 병자년, 조선은 강화도에서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한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는 당시 조선의 수교 대표였던 판중추부사 신헌의 ‘심행일기’를 토대로 소설 ‘강화도’를 엮었다. 송 교수의 표현대로 ‘조선의 지식인은 봉건과 근대 사이에 선 경계인’이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중공업과 금융업이 융성하면서 근대국가로의 기틀을 잡아가던 시기였다. 미쓰비시·미쓰이 등이 군수산업에 눈독을 들이며 제국주의의 싹도 자라고 있었다. 적어도 일본의 집권층은 국제정세를 직시하면서 체계적으로 개혁을 추진했지만 조선 조정은 외부 위기에 둔감했고 개화파도 근대화에 필요한 준비를 온전히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일본보다 경제·사회의 효율성이 낮고 중국에 비해서는 고비용 구조인 오늘의 한국이다. 한중일의 ‘혁신 삼국지’에서 패권 확보가 점차 멀어져가는 겨울, 눈 덮인 다산 초당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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