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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95>구본웅 '친구의 초상']붉게 번뜩이는 눈빛...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담다

'한국의 로트렉'이라 불리는 천재화가

동네 친구였던 시인 이상 그린 대표작

선명한 명암 대조·야수파적 붓질로

어둡고 우울한 시대 분위기 잘 표현

한국전쟁때 폭격맞아 작품 대거 소실

현재 남아있는 그림은 10여점 불과

구본웅 ‘친구의 초상’ 1935년, 캔버스에 유채, 62x50cm, ‘우인상(友人像)’이라고도 불렸는데 구본웅과 가까웠던 화가 이마동이 이상을 그린 것임을 알아봤고 세상에 알려졌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시뻘건 저 눈 좀 보소. 핏발 선 게 아니라 눈빛이 붉게 번뜩이는 거라오. 치켜 올린 짙은 눈썹 아래로 매섭게 눈이 빛난다. 까만 눈동자, 그 안에 화가는 짙은 푸른색을 덧칠했다. 지식인의 영민함과 냉철함을 품은 색이다. 눈꼬리를 한껏 끌어올리고 눈 밑에 암갈색 선을 그어 눈매를 강조했다. 그것만으로 부족했나, 화가는 선홍색 물감을 듬뿍 찍어 눈 주변에 기운을 둘러쳤다.

근대기 화가 구본웅(1906~1953)이 ‘친구의 초상’으로 그린 시인 이상(본명 김해경·1910~1937)이다. 창백한 열굴이지만 빛을 받은 높다란 코는 유난히 오뚝하고 코끝까지 팽팽한 힘이 서렸다. 파이프를 박아 넣은 두툼한 입술도 빨갛다. 눈가의 서늘한 붉은 각성이 그 입술로, 바지직거리며 담뱃잎 타들어가는 파이프 끝 불꽃으로 이어진다. 예술가 이상의 붉은 야심, 뜨거운 정열, 불꽃 같은 지성이 모두 저 빨간색에 담겨 있다. 삐뚤어진 모자와 삐딱하게 기운 얼굴에는 냉소와 경멸이 서렸다. 실제 이상이 ‘거울’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식민지 지식인의 억눌린 내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을 감추기도 했던 것처럼 이 그림도 극명한 명암대비 속에 밝게 빛나는 한쪽 볼과 어둠에 가려진 다른 쪽 얼굴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피어오른 담배연기가 하늘거리며 얼굴을 감싼다. 그림 속 이상도, 그리던 구본웅도 고뇌했을 시간이다. 식민지 지식인은 무엇을, 어찌 해야 하나. 시커멓게만 보이던, 어둠뿐이던 그림의 주변부가 보이기 시작한다. 모자를 걸쳐 쓴 주인공의 파아란 셔츠, 노을색 티셔츠가 언뜻 황금빛으로 느껴진다. 조르주 루오의 그림처럼 웅장하면서도 반 고흐의 자화상처럼 예민하다.

구본웅 ‘여인’ 1940년, 캔버스에 유채, 43x32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은 1906년 3월, 지금의 서촌 지역이며 행정구역상 필운동과 누하동이 교차하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일찍이 개화한 명문 가문이었고 부유했다. 아버지 구자혁은 고종이 황실 예산까지 출자해 설립한 출판사인 창문사(彰文社)를 경영하는 ‘깬 사람’이었다. 구본웅은 두 살 때 생모를 여의고 유모 손에 컸는데 세 살 쯤 업혀있다 떨어지는 사고로 척추가 휘어 평생 불구의 몸을 갖게 됐다고 전한다. 그 사고 이전부터 척추 쪽에 통증을 드러낸 적 있다는 유족 등의 증언에 따라 선천적 장애로 보는 이도 있지만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분명한 것은 굽은 등과 자라지 않는 키가 그의 예술혼을 자극했다는 사실이다. 구본웅은 성적이 뛰어났음에도 경기중학교 입학을 거절당했고 16세가 되어서야 경신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미술반 활동을 하며 우리나라 서양조각의 개척자 김복진에게서 조각을,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과 한국인으로 처음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떨친 이종우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927년 조선미술대전(선전)에 조각 ‘얼굴습작’으로 특선을 받기도 했으나 체력 때문에, 또한 사회주의 운동을 한 스승 김복진이 투옥된 까닭에 서양화로 돌아섰다. 그래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인 스승 사토미 가츠조는 프랑스에서 대표적인 야수파 화가 모리스 드 블라맹크(1876~1958)의 제자였는데 그 영향이 구본웅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거친 야수파적인 붓질로, 색채 상식을 벗어난 색 조합으로 친구 이상의 멋과 열정, 우울과 어둠의 시대 분위기를 담은 그림은 그렇게 탄생했다.

구본웅 ‘정물’ 1929년, 캔버스에 유채, 56x68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과 이상은 네 살 차이 나는 동네 친구였다. 구본웅의 계모 변동숙의 26살 어린 동생 변동림과 이상이 결혼했었으니 따지자면 이상이 이모부다. 이상은 1931년 선전에 ‘자화상’을 출품할 때도, 같은 해 시(詩)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해 등단할 때도 김해경이라는 본명 대신 이상이라는 필명을 썼다. 당시 구본웅이 졸업 선물로 준 화구통이 오얏나무(李) 상자(箱)여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삽화가 이승만(1903~1975)이 그린 ‘풍류세시기’에는 큰 키에 쑥대머리 휘날리는 이상과 그의 어깨보다 조금 작은 구본웅이 나란히 걷는 모습이 ‘이색적 멋장이 이상과 구본웅’이라는 제목으로 등장한다.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구본웅은 S자로 굽은 척추 때문에 배와 등이 튀어나와 어른 무릎 하나 길이만큼 작았다. 그는 체형을 가리기 위해 한복을 입고 유럽 남성들의 최신 유행 패션인 망토형의 인버네스(inverness)를 즐겨 입었다.

둘은 단짝이자 예술적 동지였다. 이상이 총독부 건축기수 일을 때려 치고 나와 백수가 되자 구본웅은 재주많은 그를 아버지의 출판사인 창문사에 취직 시킨다. 구본웅은 1934년 고미술을 연구 한다며 지금의 조선호텔 건너편 자리에 골동품상인 우고당(友古堂)을 열었다. 이곳 2층에 이상과 구본웅이 늘 같이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친구의 초상’은 이 무렵인 1935년쯤, 우고당 한구석에서 그려졌을 것으로 추론된다. 구본웅의 대표작이자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정물’은 이상이 충무로에서 운영하던 제비다방에 걸었다가 남의 손에 넘어간 작품이다. 또 이상을 소재로 한 영화 ‘금홍아 금홍아’에서는 가수 김수철이 구본웅 역을 맡았다.



‘친구의 초상’은 1972년 6월 27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막해 7월까지 열린 ‘한국근대미술 60년전’에서 구본웅 유작 9점 중 하나로 선보였다. 구본웅의 유작은 10여 점 남짓 전할 뿐이다. 일제가 주민들을 강제로 분산시키는 소개령을 내려 수원으로 이사할 때 그림을 옮겨 놓았는데,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싸그리 타 버렸다. 전쟁은 그래서 비극이다. 그나마 화가가 생전에 흑백사진으로 찍어둔 것에서 그림의 흔적만 찾을 수 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그중 8점을 소장품으로 확보한 사실이다. 당시 전시는 1969년에 설립된 국립현대미술관이 여기저기 흩어져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는 우리 근대작품을 체계적으로 한 자리에 모은 첫 기획전이었다. 이 전시의 추진위원으로 참여한 원로 미술평론가 이구열(87)은 “작품의 소재를 찾아 이례적으로 신문 광고도 낸 덕에 중요한 근대 거장들이 어떤 작품을, 어디에 남겼는지를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 전시로 구본웅의 유작을 찾아낸 이구열과 작고한 미술평론가 이경성이 작품의 미술사적 중요성을 알아보고 미술관에 구입을 권했지만 관장을 비롯한 공무원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화가라며, 구입예산이 없다는 둥 외면했다. 그때만 해도 구본웅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거의 없었던 탓이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 문학평론가 이어령이 초대주간을 맡아 ‘문학사상’ 창간호를 준비하며 표지로 문학인의 초상을 물색하던 터였다. 이구열의 소개로 1972년 10월 출간된 문학사상 창간호 표지로 이 그림이 사용됐다. 장안의 화제였다. 개인 수집가들이 유족과 접촉해 작품 구입을 문의하자 이구열이 구본웅의 장남 고(故) 구환모에게 “중요한 작품들인 만큼 국립미술관 소장품이 되어 누구나 언제든 볼 수 있는 그림이어야 한다”고 설득한 결과 작품은 미술관은 그해 연말 특별예산을 편성해 8점을 모두 사들였다. 이후 1983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구본웅 특별전이 열렸다. 지금도 미술관 과천관의 소장품 특별전 ‘근대를 수놓은 그림’에서 1930년작 ‘여인’과 ‘꽃’, 1927년작 ‘비파와 체리(포도)’를 볼 수 있다.

한편 구본웅은 영화 ‘밀정’의 모티브가 된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사건의 김상옥이 일본 경찰과 벌인 마지막 총격전을 18세 때 목격했다. 구본웅의 시화첩 ‘허둔기(虛屯記)’에 그때를 회상하는 시그림 한 편이 등장한다. “아침 7시 찬바람. 눈쌓인 벌판. 새로진 외딴집 세 채를 에워싸고 두겹 세겹 늘어 선 왜적의 경관들 우리의 의열 김상옥 의사를 노리네. 슬프다. 우리의 김 의사는 양손에 육혈포를 꽉 잡은채. 그만- 아침 7시. 제비(김의사의 별명을 제비라 불렀음) 길을 떠났더이다. 새봄되오니 제비시여 넋이라도 오소서.”

그랬던 구본웅이건만 친일했었다. 1940년 7월 구본웅이 쓴 ‘사변과 미술인’을 통해 그는 “미술인이여! 우리는 황국신민이다”를 외치며 일제의 태평양전쟁에 참전할 것을 권했다. 안타까워라. 그림 속에서 눈 번쩍이던, 함께 조국과 미래를 얘기하던 친구 이상이 그렇게 일찍 떠나지 않았더라면 살아남은 친구는 흔들리지 않았으려나. 해방 후 41세이던 해에 구본웅은 ‘해방과 우리의 미술건설’이라는 글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친일 행적을 참회한다.

“나의 미술적 수학 내지 수업이 왜정의 손끝에서 되었다. 고고히 나의 미술이 왜적倭的 감념感念이 없다고 그 어찌 선뜻 말하겠는가? …나는 솔직히 말하노니, 나의 뇌수를 청소시키지 않고는 참다운 나를 찾지 못할 것이며, 그 청소는 쉽사리 일조일석에 완전치 못할 것이다.”

절친한 벗이 묻는다. 그대 지금 무슨 꿈을 꾸는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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