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과의 조선업 협력을 직접 언급한 데 이어 미국 해군성 장관까지 국내 조선소를 직접 둘러보는 등 한국 조선 산업에 대한 미국 측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미 조선 협력은 통상 협상에서도 주요 의제로 다뤄지고 있어 미국의 조선업 재건에 한국이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4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존 펠란 미국 해군성 장관은 HD현대중공업 울산 본사와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의 상선·함정 건조 시설을 둘러봤다. 미 해군성 장관이 한국을 찾은 것은 카를로스 델 토르 전 해군성 장관에 이어 약 1년 2개월 만이다.
미국 측이 한국 조선 산업에 공개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직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선박 건조와 (MRO)유지·보수·정비 분야에서 협력하자”고 제안한 데 이어 지난달 8일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의 통화에서도 관세·통상 문제와 함께 조선 분야 협력을 콕 집어 언급했다. 통상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부 장관이 한국과의 ‘2+2 통상협의’를 마친 뒤 “한국이 최고의 제안(A game)을 가져왔다”고 호평한 것 역시 한미 조선 협력 가능성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처럼 미국이 K-조선 산업과의 협력에 적극적인 것은 미중갈등 구도 속에서 미국의 해양력(sea power)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제조 역량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해양력이란 한 나라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해양을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을 일컫는 지정학 용어다. 해군의 군사적 역량은 물론 상선의 제조·운영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해양력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미 해군 제독 출신 지정학자인 알프레드 마한이다. 마한은 고대 아테네부터 근대 영국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에서 패권적 지위를 차지한 국가들은 예외없이 압도적인 해양력을 발휘했다고 강조했다. 해로는 육로보다 빠르고 저렴하게 세계 곳곳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몽골이나 러시아 등 광대한 유라시아를 기반으로 한 ‘육지 패권 국가’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해양 패권 국가’가 이들을 효과적으로 포위함으로써 억제할 수 있다고 봤다.
이같은 해양력 개념은 이후 미국이 세계 전략을 짜는데 기초 교본이 됐다. 미국이 소련을 대상으로 영국의 남진 억제 정책을 본뜬 봉쇄 정책을 사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 세계 언제 어디에서나 국가급 해·공군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항공모함 전단은 압도적인 미국 해양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문제는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미국 해양력의 독보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점이다. 2000년대 이후 미국 조선업이 사실상 붕괴 상태에 빠지면서 미 해군 함대의 역량도 약화됐다. 이라크전을 마친 이후 막대한 건조·운영 비용이 드는 항공모함에 대한 미국의 투자가 줄어들기도 했다. 실제 미국에는 한 때 배를 만들었던 조선소가 총 414곳에 달하지만 이 중 여전히 배를 만들고 있는 곳은 21곳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대부분 연안에서 활동하는 중소규모 선박을 건조하는 곳으로 알려졌다. 대형 상선이나 크루즈선 유조선·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부유식해상 구조물 등 중대형 선박을 건조할 기반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의미다. 실제 지난해 전 세계에서 발주된 선박은 1910척인데 이 중 미국이 수주한 것은 2척에 그쳤다.
반면 중국은 사실상 세계 조선업을 장악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의 수주 실적은 1711척 4645만CGT로 전 세계의 70%를 차지했다. CGT는 선박 노후도까지 고려한 환산 톤 수다. 한국은 250척 1098만CGT로 17%를, 일본 등 기타 지역은 451척 828만CGT로 13%를 차지했다. 고부가 대형 선박 시장으로 한정해도 사실상 한국과 중국이 발주 물량을 양분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조 기반 약화는 미 해군의 전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해 6월 기준 미국이 보유한 전함은 243척으로 중국(427척)의 57% 수준에 불과하다. 물론 함정 숫자만으로 해군력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중국은 항공모함과 함께 이지스급 구축함과 대형 잠수함을 빠르게 건조하며 미국의 해양력에 도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10년 이내 중국의 구축함·순양함·호위함 총배수량이 미국을 앞지를 것으로 예상한다. 미 해군은 전 세계에 배치된 데 비해 중국 해군의 작전 구역은 동아시아 일대에 국한된다는 점도 미국에겐 부담 요인이다. 여기에 제조 역량마저 중국에 밀리면서 중국 전함은 70% 이상이 2010년 이후 진수된 데 비해 미 해군은 75% 이상이 2010년 이후 진수되는 등 군함 노후화 측면에서도 미국은 큰 어려움에 처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운동을 하면서도 미국 조선업 재건을 강조한 것은 이같은 상황을 고려한 전략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미국 상·하원 합동의회 연설에서도 “군함과 상선을 포함한 미국의 조선업을 부활시킬 것”이라며 “이러한 산업이 미국으로 돌아오도록 유도하는 세제 혜택을 검토할 부서를 백악관 산하에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조선업 부활이라는 과제를 하루아침에 마무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고부가가치 대형 선박을 건조하는 데는 수십 년간 누적된 건조 노하우와 고숙련 인력이 필요하다. 미국 제조업 인력의 평균 임금이 중국은 물론 한국보다도 훨씬 높다는 점도 부담이다. 미국으로서는 당장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수한 제조 역량을 보유한 동맹’과의 협력이 절실해진 셈이다. 미국이 K-조선에 잇따라 러브콜을 띄우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 조선업계는 양적 측면에서 중국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의 제조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과 달리 군함·잠수함·쇄빙선·LNG운반선 등 특수 선박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동맹국이면서 미 해군이 요구하는 품질 요건까지 만족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한국뿐이라는 이야기다.
지난달 30일 한국 조선소를 직접 찾은 펠란 장관은 “이처럼 우수한 역량을 갖춘 조선소와 협력한다면 적시 유지·보수가 가능해져 미 해군 함정이 최고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선박 인도부터 성능 검증까지 품질을 보증한다는 한국 측 설명에 펠란 장관이 감탄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미국 내 법 개정 작업이 마무리되면 한미 조선 협력이 본격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은 1920년 자국 연안을 운항하는 선박은 미국에서만 건조하도록 하는 ‘존스법’을 제정해 미국 조선업을 보호하고 있다. 또 1965년과 1968년 도입된 번스-톨레프슨 수정법에 따르면 미국 군함은 자국 조선소에서만 만들어야 한다. 현재 미국 상하원에는 이같은 규제를 핵심 동맹국에 한해 풀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이 다수 발의돼 있다. 여당인 공화당이 상·하원에서 다수 의석을 점하고 있는 데다 민주당 역시 해군 재건의 시급성에 공감하고 있어 관련 법안은 무난히 통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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