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은 언제나 힘들다. 들뜬 기분은 채 1시간도 가지 않는다. 허리는 뻐근하고, 피부는 푸석해진다. 어느 순간 퉁퉁 부은 발 때문에 신발도 제대로 신기 어렵다. 애써 잠을 청해보지만, 비행 내내 잠을 자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아무리 서비스가 좋은 항공이라도 육체의 피로까지 돌봐주기는 어렵다.
런던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까지도 이 같은 걱정은 계속됐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영국 런던까지 소요되는 비행시간은 10시간 40분 남짓.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체력으로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을 감당할 수 있을까 겁이 났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영국항공에서 인천-런던 노선에 도입한 보잉 787, 이른바 '드림라이너'의 비즈니스 클래스 '클럽 월드 Club World'덕분이었다.
탑승 수속이 시작되고 게이트가 열렸다. 매번 이코노미석을 이용했던 탓에 기내에 들어선 기자는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향했다. 특유의 세련된 영국 억양의 여승무원이 웃으며 기자에게 말했다. "손님은 왼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비즈니스석에 들어간 기자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특이한 좌석구조였다. 드림라이너의 비즈니스 좌석은 크게 '2-3-2' 형태로 구성돼 있다. 독특한 것은 모든 좌석이 서로 마주 보게 설계됐다는 점이다. 이는 영국항공에서 고안한 좌석 배치 시스템 '잉 양 Ying Yang' 구조가 적용된 결과다. 잉 양 구조는 '클럽 월드'를 주로 이용하는 비즈니스맨들을 위해 고안된 구조다.
영국항공 본사 소속의 던킨 로버츠슨 Duncan Robertson 기내 프로덕트 매니저는 말한다. "대개 비즈니스맨들은 비행 중에도 끊임없이 일합니다. 특히 옆자리에 앉은 동승자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돌려 대화해야 하죠. 오랜 시간 한 자세를 유지하다 보면 목과 허리에 피로도가 쌓입니다. 하지만 잉 양 구조는 서로 움직임 없이 마주 보고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도와줍니다. 비행 중 장시간 업무에서 오는 피로도를 줄일 수 있어 비즈니스맨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항상 아는 동료, 지인과 좌석에 앉는 것은 아니다. 행여 모르는 사람이 옆 좌석에 앉게 되면 서로의 얼굴을 비행 내내 바라봐야 한다. 불편하기 짝이 없다. 영국항공은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가림막을 별도로 설치해놓았다. 좌석 옆에 부착된 버튼을 누르면 가림막이 올라와 독립된 공간을 선사한다.
'클럽 월드' 좌석의 또 다른 장점은 일자형 침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국항공은 글로벌 항공사 최초로 지난 2008년부터 일자형 침대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다. 180도로 좌석을 눕힐 수 있어 수면 시에도 침대와 같은 편안함을 제공한다. 특히 이 좌석은 영국의 디자인 업체 '텐저린 디자인'의 공동 대표인 한국인 이돈태 사장이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영국항공에서 도입한 드림라이너에는 총 214개의 좌석이 마련돼 있다. 기자가 탑승한 '클럽 월드' 클래스는 총 35석이다. 이코노미석으로 분류되는 '월드 트래블러 World Traveler'는 154석, 이코노미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월드 트래블 플러스 World Traveler Plus'는 총 25석이다.
승객 탑승이 끝난 비행기가 천천히 활주로를 향해 이동했다. 즐거운 비행을 약속한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있고 나서 드림라이너는 이륙을 위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소음이 적었다. 비행 고도에 도달하는 과정에서도 비행기 특유의 무게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확연히 다른 비행 체감의 원인은 다름 아닌 항공기 소재와 엔진 모양에 있었다.
우선 드림라이너는 기체의 대부분이 탄소섬유 복합소재로 구성됐다. 탄소섬유 복합소재는 무게는 가볍지만, 내구성이 좋은 소재다. 최근 보잉, 에어버스 등 주요 항공기 제조사들은 앞다퉈 탄소섬유 복합소재를 활용한 항공기 제작에 나서고 있다.
탄소섬유 복합소재의 또 다른 장점은 연료효율이다. 비행 중 잠시 만난 기장은 "드림라이너는 탄소섬유 복합소재를 사용해 이전 모델인 보잉777 기종보다 무게는 70% 감소했지만, 연료효율은 20% 증가했다"며 "영국항공뿐 아니라 경쟁사들도 드림라이너를 주력 기종으로 부각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드림라이너의 또 다른 특이점은 바로 엔진의 모양이다. 기존 항공기들은 엔진 뒤쪽이 반듯하게 디자인돼 있다. 반면 드림라이너의 경우 엔진 뒷부분이 물결 모양을 이루고 있다. 영국항공 측은 이에 대해 물결 모양이 단지 디자인만을 위한 선택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기장은 "물결 모양 디자인을 통해 기존 엔진보다 소음을 약 60% 이상 줄일 수 있다"며 "장시간 비행에서도 쾌적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원인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드림라이너가 비행 중 내는 소음의 정도는 약 85데시벨(db)인데, 이는 기존 비행기 소음인 120db의 70% 수준이다.
꽤 오랜 시간 드림라이너에 대한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진짜 궁금한 것은 엔진이나 소재가 아니었다. 드림라이너 엔진에 관심 있는 탑승객이 얼마나 될까? 실제로 기내에서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드림라이너의 장점이 궁금했다. 기장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기자를 객실 창문으로 데려갔다.
"기존 항공기 창문과 다른 점이 보이시나요?"
솔직히 단번에 다른 점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창문 크기가 조금 커진 듯 보였지만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뭔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맞다. 창문 덮개가 없었다. 기자의 답에 기장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드림라이너에는 창문 덮개가 없다. 대신 창문 아래 작은 버튼이 설치돼 있다. 탑승객은 이 버튼을 통해 창문의 투명도를 조절할 수 있다. 햇볕이 따가운 곳에서도 투명도 조절을 통해 마치 선글라스를 끼고 바깥 경치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창문 크기는 기존 항공기보다 세로 길이가 8cm 늘어난 19인치로 비행 중 보다 넓은 하늘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밖에 비행의 무료함을 달래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최신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을 탑재한 드림라이너는 모든 좌석에 와이드스크린 TV를 갖췄다. 특히 다른 좌석에 앉아 있는 승객들과 채팅할 수 있는 '인 시트 챗 시스템(in-seat chat system)'은 드림라이너 기내 서비스의 백미 중 하나다.
비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바로 기내식이다. 영국항공은 지난 2012년 12월 한국노선에 취항한 이래, 한국 승객을 위한 맞춤형 기내식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한식 기내식은 비빔밥이다. 영국항공의 비빔밥은 기존 항공사의 비빔밥과 차별된다. 따뜻한 나물을 미리 밥에 얹어 승객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기존 항공사에서 서비스하는 비빔밥은 대부분 따뜻한 밥과 차가운 나물이 따로 제공된다. 이러한 방식은 비빔밥 특유의 식감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있다. 영국항공 관계자는 말한다. "한국 취항 전, 영국항공의 기내식 담당 매니저가 한식 메뉴 개발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여러 음식을 맛보던 중 돌솥 비빔밥을 보고 현재의 기내식 비빔밥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영국항공 기내식 비빔밥은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 승객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어요." 현재 영국항공은 비빔밥뿐 아니라 불고기, 삼계탕, 미역국 등 차별화한 한식 메뉴를 선보이며 승객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이처럼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사양과 기내 서비스로 주목받고 있는 영국항공의 보잉 787 드림라이너는 향후 영국항공의 주력 기종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영국항공은 오는 2016년까지 약 50억 파운드(한화 약 8조 5,000억 원)를 투입, 24대의 드림라이너를 추가 운항할 계획이다. 영국항공 관계자는 일부 영국항공 조종사들이 드림라이너 운항을 위해 별도의 교육을 받고 있다고 귀띔했다.
에드워드 포더링엄 Edward Fotheringham 영국항공 한국지사장은 "드림라이너는 탑승객의 편의 향상에 초점을 맞췄다"며 "향상된 기술, 더 부드러운 운항과 쾌적한 환경으로 장거리 비행에서 편안함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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