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신화학물질관리(REACH)’ 제도가 세계 화학시장을 거대한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다. 유럽 소비자들에게 상품의 정확한 화학물질 정보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도입된 이 제도가 상품 하나당 최대 수백가지의 화학물질 정보를 등록하도록 요구하면서 비(非)EU 국가 산업체들에 막대한 등록부담을 주고 있다. 당장 물질정보 등록 과정에서 유발되는 비용부담과 정보유출 가능성으로 국내 화학업체의 대(對) EU 수출에 비상등이 켜졌다. 여기에 저가의 화학제품을 대량으로 세계에 공급해오던 중국업체들이 등록부담으로 대거 수출 포기를 선택할 가능성이 커 세계 화학제품의 공급균형이 깨질 가능성이 크다. REACH 제도에 대비해 이미 수년 전부터 철저한 준비를 해왔던 유럽 내 다국적 화학업체들이 등록 포기로 속출하는 공급부족분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시장 패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게 업계와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EU 환경규제 중소기업에 치명타 될 수도=REACH 제도는 내년 6월부터 6개월간 사전등록을 거쳐 오는 2018년까지 단계적으로 EU로 유입되는 모든 제품의 화학물질 정보를 EU화학물질청(ECHA)에 등록하도록 하고 있다. 이중 화학물질이 연간 1,000톤 이상인 경우 2010년 말까지, 1톤~100톤 미만이면 2018년까지 본등록 마감시한이 차등 적용된다. 이에 따라 완구류 등 일반 공산품보다는 화학물질을 원료 형태로 수출하는 유화업종 등 화학업계가 REACH 규제의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우려된다. 이 때문에 LG화학ㆍ삼성토탈 등 국내 대형 화학기업을 중심으로 지난 1년 새 REACH 대응 태스크포스(TF)가 긴급 구축되는 등 대응책 마련을 위한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당장 삼성그룹만 해도 삼성지구환경연구소를 정점으로 삼성전자와 삼성정밀화학이 간사 형태로 조직돼 REACH 대응 TF를 구성, 그룹 전체와 계열사별 대응전략을 동시 수립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REACH 제도의 파급효과가 삼성 내 특정 기업이 아닌 사실상 전 계열사에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며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수많은 하청업체에서 올라오는 부품의 물질정보까지 모두 파악해야 해 부담이 크다”고 전했다. 대기업에 비해 자본력이 크게 떨어지는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에 REACH는 자칫 사업 포기를 유도하는 치명적인 변수가 될 전망이다. 물질당 1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감당하기보다는 수출 포기를 선택할 기업이 많다는 것이다. 김지환 삼성지구환경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애써 개발한 새로운 화학물질을 EU에 팔기 위해서는 시험분석을 통해 새롭게 개발한 화학물질의 위해성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며 “문제는 새로운 물질이다 보니 다른 기업과 공동으로 분석비용을 부담할 가능성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수석연구원은 “위해성이 높은 물질은 시험분석비용이 현지에서 물질 1개당 20억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며 “여기에 20억원을 지급하고 의뢰한 분석결과가 수출 불가로 결정되면 해당 벤처기업은 사실상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화학시장 패권 유럽에 넘어가나=EU 내 글로벌 화학업체들에 REACH는 세계 화학시장 점유율을 크게 늘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전망이다. 값싼 인건비를 기반으로 세계 화학시장 공급물량을 잠식해오던 ‘눈엣가시’ 같던 중국 군소 화학업체들이 REACH의 고강도 물질규제 문턱에서 등록을 포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김 수석연구원은 “중국 화학업체들은 대부분 원료를 사다가 통에 부어 라벨만 붙이고 수출하는 식의 영세업체들이 대부분”이라며 “이들 업체가 유해 화학물을 대체할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지 못하거나 등록비용 부담으로 EU 수출을 포기할 경우 그 시장 지분만큼이 EU 업체들에 돌아가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REACH는 어떤 측면에서는 중국업체들이 그간 누려온 유리한 가격구조를 무력화하는 장치인 셈”이라고 덧붙였다. 삼성정밀화학의 한 관계자도 “최악의 경우 중국 내 로컬기업조차 중국 화학업체 제품을 외면하고 중국 내 바스프 법인의 물량을 구입하게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바스프가 중국 현지에 합작 생산법인인 ‘양쯔-바스프’를 설립하고 중국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미래 시나리오를 고려한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또 유럽 업체들에 새로운 비즈니스모델(BM)을 창출, 한정된 시장의 파이를 더욱 키워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화학업계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바스프 등이 안전하고 새로운 형태의 화학물질을 많이 개발했지만 가격이 비싸 시장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며 “REACH라는 강력한 환경 규제는 마치 지구온난화로 출현한 다양한 신재생에너지 관련 BM들처럼 유해성이 있어도 가격이 싸 인기를 끌었던 중국 제품 등을 시장에서 몰아내고 신물질 수요를 확대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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