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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네트워크장비 제조업체 A사 관계자는 조달청 전자조달시스템 나라장터에 올라오는 사업공고를 보면 한숨부터 쉰다. 장비 국산화에 성공해 벤더에 제품을 활발히 공급하고 있지만 정작 주요 수요처인 공공기관에서 제품을 외면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실제 5월 나라장터에 등록된 한 지방자치단체의 노후장비 교체사업 사업제안요청서에는 HP C7000, HP BL680C 등 특정 브랜드의 모델명만 명기돼 있다.
#274㎝×156㎝, 총무게 770㎏, 독일산(함부르크)…. 지난달 천안시 예술의전당 그랜드피아노 구매 입찰 공고에 나온 규격이다. 브랜드나 모델명을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이 규격에 해당하는 제품은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다. 바로 독일 명품 피아노브랜드 스타인웨이-D274 모델이다.
특정 브랜드나 제품만 지정해 영세업체의 조달시장 입찰 기회 자체를 애초부터 차단하는 조달행정이 중소기업의 설 자리를 빼앗고 있다. 특정 브랜드를 밀어주는 이런 '조달 꼼수' 때문에 애써 제품을 개발하거나 국산화에 성공한 중소기업은 브랜드 파워가 약하다는 이유로 공공구매 시장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견 네트워크장비업체의 한 관계자는 "공공기관이 제품규격서에 브랜드나 모델명을 명시하거나 특정 제품만 만족시킬 수 있는 규격을 제시해 사실상 제품을 지정구매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거나 가격이 비싸 탈락한다면 모르겠지만 아예 납품 기회를 차단당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하소연했다.
특히 심각한 것은 나라장터를 운영하는 주체인 조달청이 제품을 구매하는 수요 기관이 이런 규격을 들고나오면 제재할 수 없다며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규격서 내용을 일일이 검토할 수 없다며 뒷짐을 지고 있다는 게 중소업계의 공통된 불만이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조달청의 한 관계자는 "규격검토를 해 경쟁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수요기관에 규격을 더 완화하라고 요구한다"며 "하지만 수요 기관에서 그 규격을 고집하면 (조달청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공고를 낸 수요 기관은 장비 간 품질차이나 사후관리(AS), 기존 장비와 호환성, 전문가의견 등 다양한 이유로 특정 제품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네트워크장비 입찰공고를 낸 국민체육진흥공단 관계자는 "과거 작은 업체의 장비를 사용했지만 고장이 잦거나 장비를 사용하는 도중 업체가 도산해 사후관리를 받을 수 없었다"며 "하루에도 수백억원이 거래되는 사이트의 특성상 안정성을 중시할 수밖에 없어 특정 브랜드를 지정했다"고 강변했다.
중소업계에서는 그러나 일부 관리상의 불편은 인정하면서도 제대로 된 입찰 과정을 거친다면 품질을 충분히 검증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과거 납품이력, 회사의 재무 상태, 기술인증 획득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낙찰자를 선정하는 적격심사제도 같은 대안이 있어 가격만 앞세운 함량 미달 업체는 충분히 걸러낼 수 있으며 아예 기회조차 박탈하는 건 수요기관의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이라는 지적이다.
A사 관계자는 "과거라면 모를까 지금 국내 중소기업 제품의 품질이 떨어진다는 건 막연한 생각"이라며 "안 쓰던 제품을 쓴다는 두려움에 써 보지도 않고 외면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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