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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난장판' 아닌 '난장' 승화를


2007년 12월 충남 태안군 앞바다에서 사상 최악의 기름 유출사고가 일어났을 때였다. 기자도 취재 차 태안으로 향했다. 솔직히 '답답한 기자실에서 벗어나 하루 바닷바람 쐰다'는 마음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태안 현장은 충격에 가까웠다. 아름다웠던 해안가는 시커먼 기름에 뒤덮였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악취가 풍겨왔다. 무엇보다 온몸에 기름을 묻힌 채 묵묵히 타르 찌꺼기를 닦아내는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주눅이 든 기자도 사진 몇 장 찍고, 몇 명 인터뷰한 다음에 바위나 조약돌을 열심히 닦아댈 수밖에 없었다. 당시 태안으로 달려간 자원봉사자 수는 초등학생·장애인을 비롯해 123만명에 달했다.

바로 그 순간에 대한민국 국회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BBK 특별검사법안' 통과를 둘러싸고 쇠사슬과 전기톱이 동원된 패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대비되는 두 현장은 대한민국 선진화를 가로막는 주범이 '미개한 국민'이 아니라 삼류 정치와 정부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번 세월호 참사도 우리 국민이 역경을 만났을 때 얼마나 큰 공동체 정신과 역동성을 발휘하는지 잘 보여준다. 다른 학생에게 구명조끼를 전해주다 희생된 고등학생, 더 형편이 어려운 가족에게 주라며 성금을 사양한 유가족, 생업을 팽개치고 수색에 동참한 어민들, 전국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 등 셀 수 없을 정도다.

역경 때마다 공동체 정신 발휘

세월호 사태를 전후해 지구촌에서는 말레이시아 여객기 실종, 보코 하람의 나이지리아 여학생 집단납치, 터키 탄광사고 등 참사가 여기저기 터졌다. 국가의 후진성이 비극을 불렀고 정부의 무능한 대처가 국민적 분노를 키웠다는 점은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국민의 태도다.

단지 우리 국민이 세월호 사태에 대해 '정(情)'과 '한(恨)'에 기반을 둔 공동체 정신을 발휘했다는 측면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한국 사회의 문제점과 한계에 대해 고문에 가까울 만큼 자기반성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포브스 등 외신들이 "심각한 변화가 필요할 때 움직일 수 있는 나라는 몇 안된다"며 "한국 사회의 강점은 끊임없이, 빠르게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극찬하고 있을 정도다.



우리 국민은 근대화 과정의 숱한 우여곡절을 거치며 성취욕이 크고 강인한 DNA를 갖게 됐다. 한 세대 안에 선진국 수준의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쟁취한 나라는 지구촌에서 한국밖에 없다.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길거리 응원 등에서 보듯 슬픔과 기쁨을 집단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데도 탁월하다.

현재 우리 사회는 복지와 성장, 사회정의와 기업 이익,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등 여러 부문의 불균형을 놓고 담론이 홍수를 이룬다. 이 모든 게 더 좋은 나라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려는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이 침몰했다"거나 "한국의 발전 모델은 끝났다"는 식의 자기비하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드와이트 퍼킨스 하버드대 아시아센터 소장은 이번 비극의 교훈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한국은 1960년대 이래 기존의 성장 전략을 숱하게 보완하는 과정에서 성공 신화를 써왔다"며 "현재의 전반적인 국가 발전 전략을 바꿔야 하는지는 의문"이라고 답했다. 다양한 영역에서의 규제 강화, 복지 시스템 확충 등이 필요하지만 한국의 강점을 버리지는 말라는 뜻이다.

국민에너지 모아 혼란 이겨내야

특히 국민의 분노를 정권 안정이나 정파적 이익으로만 접근하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우려된다. 한국은 한국전쟁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살아나 1970~1980년대의 '경제 기적'과 1980년 말의 '정치 기적'을 만들어냈다. 이 과정을 통해 국민은 스스로의 힘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 같은 국민적 자각에 맞서는 그 어떤 정치적 시도도 혹독한 역풍을 만날 게 자명하다. 정치권 역시 지금의 사회적 혼란을 난장판으로만 보지 말고 '난장(亂場)'을 통해 흉년·역병 등 각종 재난을 삶의 에너지로 응집시키고 승화시켰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비극에서 나타난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시켜 경제·정치를 넘어 '사회 기적'을 이룬다면 한국을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이끌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이다. /뉴욕=최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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