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이 깊은 두 나라 사람들이 같은 배를 탔다. 배가 커다란 강의 한복판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광풍이 불고 거센 파도가 일어 침몰 위기에 처했다. 이에 두 나라 사람들은 힘을 모아 돛을 펼치며 배의 균형을 잡고 노를 저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중국 춘추시대 병법서인 손자병법(孫子兵法)의 구지(九地)편에 나오는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이 책에는 ‘그들이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풍랑을 만나면 서로 돕기가 마치 좌우의 손과 같았다(當其同舟而濟遇風 其相救也若左右手)’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같은 배를 타고 강을 함께 건너간다’는 뜻의 동주공제(同舟共濟)란 말이 나왔다. 적대적 관계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협력함으로써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오월동주(吳越同舟)도 유사한 표현이다.
이렇게 원수 사이인데도 거센 풍랑 앞에서는 힘을 모으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전방위적 압박으로 경제·안보 등 복합위기에 처한 우리나라의 상황은 사뭇 다른 듯하다. 전략적으로 국익과 실용의 관점에서 고차방정식을 풀기 위해 바둑판처럼 전체를 조망하며 한 수 한 수 신중하게 돌을 놓아야 하는 데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제각각이어서 파열음이 크다.
심지어 일부 보수 세력과 극우 기독교계는 트럼프 행정부 안팎의 인사들을 향해 “이재명 대통령이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하고 있다. 한 보수단체가 최근 서울대 앞에서 주최한 행사에서는 ‘차이나 리, 스톱 더 스틸(China Lee, Stop The Steal)’이라는 손팻말이 등장했다. 이 자리에서 모스 탄 미국 리버티대 교수가 “트럼프 대통령이 브라질에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50% 관세를 부과하기로 한 것처럼 한국에도 비슷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일부 청중들이 “USA”를 연호한 것은 씁쓸한 장면이다. 보수 세력들은 미국 현지에서도 기자회견, 광고, 영화 상영 등을 통해 근거도 없이 새 정부와 중국의 유착 의혹을 제기한다. 트럼프가 2020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의회 폭동까지 방조했던 점을 교묘히 파고든 것이다. 또 제1야당의 일부 의원들이 부정선거론자들을 국회로 초청해 포럼을 열거나 미국 조야 인사들을 상대로 새 정부를 중국과 연결해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보수 세력들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미 행정부와 공화당·기독교계 등에 사실을 왜곡해 전달하면 할수록 우리 국익을 해칠 수 있다는 점이 큰 문제다. 자칫 트럼프 정부의 관세·비관세·방위비 복합 압박 강화와 새 정부의 대미(對美) 협상력 저하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취임한 지 40일이 넘도록 한미 정상회담 일정조차 확정되지 않은 것이 이 대통령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신뢰 부족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미 국무부에 근무하는 한 지인은 사적으로 조심스레 “이 대통령이 사회주의자 같다. 미국보다는 중국과 가깝지 않느냐”며 경계심을 표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에 5대 5 균형을 맞추는 식으로 외교적 접근을 함으로써 빌미를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외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처럼 트럼프 일가 및 공화당 측과 소통할 수 있는 이들을 대미 특사단에 포함시키는 게 효과적이다. 한미 양국의 보수 세력 포용에 적극 나서야 된다는 얘기다. 이재명 정부는 굳건한 한미동맹을 토대로 조선·원자력·에너지 분야 등의 ‘윈윈’ 산업 협력 방안을 제시하면서 상호관세 협상과 농축산업 같은 비관세시장 개방에서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보호주의 확산과 공급망 급변에 대응해 원칙적으로 관세 철폐를 추구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안보 측면에서는 주한미군이 양국에 모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무리하게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적정 수준의 방위비 인상 카드를 내놓고 핵 잠재력 확충을 위한 원자력협정 개정을 주고받는 것도 검토할 수 있다. 지금은 정치적 입장이 다르더라도 복합위기 앞에서 국익을 위해 동주공제의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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