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계에 진화론자 다윈이 있고, 천문학계에 지동설을 내 놓은 코페르니쿠스가 있다면 20세기성과학에는 앨프리드 킨제이(1894∼1956년)가 있다. 그는 1948년 '인간 남성의 성 행동 연구', 1953년 '인간 여성의 성 행동 연구' 등 이른바 '킨제이 보고서'를 통해 금욕적인 사회분위기와 상반된 다채로운 실제 성 생활을 공개했다. 임신을 위한 성 활동만이 '정상적'으로 여겨지던 당시 분위기에서 1만 명 이상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발간된 보고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킨제이는 논란에 대한 해명에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고 말년에는 연구비 지원이 부족해 고생하기도 했으나, 중세 이래로 지속된 성적 억압을 끊어냈다는 점에서 그는 혁명을 이뤄낸 학자로 불릴 만 하다. 영국 출신의 저자는 킨제이 평전이자 연구서인 이 책을 통해 그의 생애와 연구 업적을 심층적으로 파고든다. 특히 킨제이의 성장 배경에 주목했다. 당시 미국은 유대교 관습에 바탕을 둔 영국교회법이 사회를 지배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엄격한 감리교도인 아버지에 대한 반발은 킨제이에게 수집욕, 승부욕, 독립욕을 다지게 했다. 처음에는 곤충학자로 벌의 행동을 연구하던 킨제이는 인간의 성 행동에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였다. 당시 성 연구는 학자가 관심 가질 분야가 아니었음에도 킨제이는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자료수집에 매진했다. 나아가 킨제이의 삶 자체가 연구활동이 됐다. 킨제이는 경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수감된 '교정 농장'을 방문해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겼다. 본인의 결혼생활이 원만했지만 연구팀원 및 그 배우자들과 함께 '개방형 결혼 실험'에도 나섰다. 성적 소수자들에게 일일이 격려의 편지를 보낼 정도로 다정한 면모도 보였다. 당시로서는 대부분의 주(州)에서 불법이던 혼전성관계에 대해 찬성하는 등 모든 성적 억압에 맞선 진정한 사회개혁가였다. 그러나 엇갈린 평가도 공존한다. 동성애자로 편견에 빠져 과학적 연구결과를 주관적으로 해석했다는 극단적 비난부터 성적 개방성을 존중한 좌파적 지식인이었다는 평도 뒤따른다..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저자는 수많은 사회적 편견에 의해 가공되었던 킨제이라는 인물과 그의 연구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한다. 성에 대한 대중의 무지가 경악할 수준이었던 20세기 말의 성적 시대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성적 다변화가 어떤 토양에서 싹을 틔웠는지를 보여준다. 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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